옥천갑부 오윤묵 집터 명치천황 추모비는 누가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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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갑부 오윤묵 집터 명치천황 추모비는 누가 만들었을까?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9.02.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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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 일제강점기 관선 충북도평의원 역임…사비들여 일본어 보급
옥천 향교 인근 일제 관직 박힌 송덕비, 집터에선 천황추모비 발견
2007년 충북 옥천군 옥천 구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충북도평의원을 지냈던 오윤묵씨 집터에서 일 왕을 추모하는 비석이 발견됐다. 또 옥천 향교 인근에는 충북도평의원을 지낸 오윤묵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까지 남아있다.(사진 박명원 기자, 편집 우혜민 기자)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는 16개의 비석이 모여 있습니다. 교동리는 원래 옥천읍터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래서 구읍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구읍에는 당대의 부자들이 모여살았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의 생가가 위치해 있습니다.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씨는 당시 옥천 최고 갑부중 하나였습니다. 또 옥천갑부 김기태가 살았던 고택도 이곳에 있습니다.

또 ‘향수’를 쓴 시인 정지용의 생가터도 구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동리 비석군은 대부분 조선시대 군수와 현감의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대부분입니다.

16개의 공덕비중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道評議員 吳允默 頌德碑’ (도평의원 오윤묵 송덕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散萬金財(산만금재) 鮮衆民嗷(선중민오) : 만금의 재산을 헐어, 백성의 근심을 덜었다.

值歉施悳(치겸시덕) 咸頌齊口(함송제구) : 흉년이 들면 덕을 베풀어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한다. (해설 : 신석준 사람플러스 대표)

이런 내용들도 비석에 새겼습니다.

그렇다면 오윤묵은 어떤 사람일까요?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하면 1878년 태어난 인물로 대한제국의 관원이라고 나옵니다.

1925년 4월 1일 발행된 개벽제58호 ‘충북답사기’에서 차상찬 씨가 오윤묵씨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유독 옥천은 타지방의 부호들이 반대로 모혀든다. 현재에 옥천의 수부안이 충북의 거부라 가위 할 오윤묵君도 경성에서 이래하얏고 (오씨는 원 함경도인으로 이용익 시대에 졸부가 되얏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1908년 발행된 서북학회 월보 제3호에 실린 회원명단에도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서북학회는 함경도 출신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7년 충북 옥천군 옥천 구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충북도평의원을 지냈던 오윤묵씨 집터에서 일 왕을 추모하는 비석이 발견됐다. 또 옥천 향교 인근에는 충북도평의원을 지낸 오윤묵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사진은 오윤묵 송덕비.(사진 박명원 기자)
2007년 충북 옥천군 옥천 구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충북도평의원을 지냈던 오윤묵씨 집터에서 일 왕을 추모하는 비석이 발견됐다. 또 옥천 향교 인근에는 충북도평의원을 지낸 오윤묵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까지 남아있다.(사진 박명원 기자)

 

 

국어강습 했다는데 알고보니 일본어

 

오윤묵씨가 일제강점기 시절 맡았던 관직은 ‘도평의원’입니다. 일제는 1920년 7월 29일자로 조선도지방비령을 공포합니다. 그러면서 도지사의 자문기구로 도평의회를 구성합니다. 의장은 도지사가 맡고 관선과 선출직 평의원으로 구성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에 따르면 오윤묵은 1927년 제3대 관선 도평의원에 오릅니다. 관선도의원에는 충북의 대표적인 친일인사였던 민영은과 방인혁과 일본인 3명으로 돼 있습니다.

민영은은 청주갑부로 일제에 비행기(애국호)를 헌납하는데 앞장섰던 친일인사입니다.

장달수의 한국학카페에 따르면 오윤묵이 국어강습회를 연 사실을 소개합니다.

이에 따르면 충북 옥천군 읍내면 오윤묵吳은 자기집에 사립학교와 국어야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운영비를 자(부)담하는 한편 박창화를 교사로 고빙한 후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이에 대한 근거로 매일신보 1912년 1월 13일 ‘충북의 독지가’란 기사를 언급합니다)

국어야학교인데 한글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하니 이 부분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집터에서 발견된 일본천황 사망추모비

 

오윤묵씨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옥천군 옥천읍 춘추민속관 전경. 이곳에서 일 명치천황을 사망 1주년을 추모하는 비석이 발견됐다.(사진 박명원 기자)
2007년 충북 옥천군 옥천 구읍에 있는 일제강점기 충북도평의원을 지냈던 오윤묵씨 집터에서 일 왕을 추모하는 비석이 발견됐다. 또 옥천 향교 인근에는 충북도평의원을 지낸 오윤묵으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사진은 오윤묵씨 집터에서 발견된 명치천황 사망 1주년 기념 추모비(사진 박명원 기자)

 

민족문제연수소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직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명단에 올랐습니다. 관직에 오른다는 것 그 자체로 일제에 부역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윤묵은 도평의원을 지냈지만 그 명단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옥천읍 문정리에 위치한 오윤묵이 살았던 집터에서 2007년 이상한 비석이 하나 발견됩니다.

이 기념비는 대략 폭 27㎝, 높이 170㎝ , 너비 23㎝에 이르고 앞면에는 ‘명치천황어일주년제기념비(明治天皇御一週年祭紀念碑)’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대정이년칠월삼십일(大正二年七月三十日)’이라는 날짜가 새겨있습니다.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1913년이 됩니다.

뜻은 명치천황이 죽은 일주년을 기리면서 세운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명치천황은 일본의 제122대 왕으로 1867년 16세의 나이에 황제에 오릅니다. 이듬해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치고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고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왕으로 일본인들의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각에서 보면 1876년 강화도조약,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국치 등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비석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2005년 이 건물을 인수한 정태희씨가 허물어진 사랑채를 철거하는 과정서 마루 밑 디딤돌로 쓰이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태희씨는 2005년 5월 집을 인수 할 당시 기념비는 ‘명치천황어일주년제기념비’라는 글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깊이로 파묻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정 씨는 "160여년 된 이 집에는 일제 강점기 당대 최고의 지주가 살았던 것으로 전해들었다"며 "발견 당시 비의 상태로 봐 해방 이후 누군가가 고의로 디딤돌로 묻은 것으로 보이며 역사적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마당 귀퉁이에 옮겨 세웠놨다"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누가 세웠을까?

 

현재 이 집은 춘추민속관이라 이름 지어지고 한옥을 체험하는 민박시설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영업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 집은 오윤묵의 부친인 오상규(조선 말 강화군수)가 1856년 건축하고 이후에 아들인 오윤묵이 증축한 건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옥천군 향토유적으로 지적된 상태입니다.

문제는 이 기념비를 누가 세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세웠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옥천신문 이안재 상임이사는 “비가 세워진 1913년 당시 이 집엔 오상규씨와 오윤묵씨가 거주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오윤묵씨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관선 충북도평의원을 지낸 인물입니다.

관선 충북도평의원으로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송덕비까지 존재합니다.

관리도 허술합니다. 발견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친일잔재 유산으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줄곧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옥천군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관리는 집주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도 모른채 천황을 기리는 비석이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있습니다.

아 참! 정말로 이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 여전히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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