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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정치·행정 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받은 감곡면장 공덕비음성군 감곡면 친일인사 남상철씨 공덕비 방치
남씨, 1920년부터 20년 가까이 감곡면장 맡아
신도 돈 걷어 일제 헌납한 천주교단체 대표 지내
음성군 감곡면 사무소에는 쇼와천황 즉위 기념대례장을 수상하고 신도들의 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한 천주교 단체의 대표를 맡은 남상철씨의 공덕비가 보전돼 있다. 남 씨는 조선총독부 감곡면장으로 1920년부터 20년 가까이 직을 수임했다.
음성군 감곡면 사무소에는 쇼와천황 즉위 기념대례장을 수상하고 신도들의 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한 천주교 단체의 대표를 맡은 남상철씨의 공덕비가 보전돼 있다. 남 씨는 조선총독부 감곡면장으로 1920년부터 20년 가까이 직을 수임했다.
1941년 매일신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1941년 5월20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격인 매일신보는 <신도천명이 참집 / 천주교경성연맹총회>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합니다.

이에 따르면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총회는 17일 신궁참배 의회 등 첫날 일정을 맞추고 다음날 18일 오후 4시부터 동 교회 강당에서 지방교회연맹 40명과 이사장 등 60여명과 일반신도 1000여명이 모여 노기남 이사장 사회로 총회를 식순에 의해 개최했습니다.

식순은 국가(기미가요)봉창, 궁성요배(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절을 하는 것)를 시작으로 짜여졌습니다.

7개월 후인 1941년 12월 14는 매일신보는 다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 대한 두 건의 기사를 다시 보도합니다.

1941년 매일신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매일신보는 “적성(적군)의 미영(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대동아전쟁의 전단이 벌어지면서 시국은 더 중대화하여 이때야말로 1억 국민이 다함께 필승을 기하도록 총결속 총돌진을 감행치 않으면 아니될 터이어서 국내 3천여 천주교도 들도 분연히 궐기하여 신도결전대회를 개최했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면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주치로 부내 명치정 천주교회 구내 대강당에서 3천여 신도가 모여 포악한 미영 두 나라의 타도를 선언하는 동시에 시국강연으로서 필승의 결의를 굳게 했다”고 합니다.

이어 “신도들은 조신신궁을 참배하여 우리 황군의 전첩과 무운장구를 기원할 터이다. 그리고 이에 앞서 14일 오전 10시 부내 명치정 중렬정 혜화정 영등포정 네곳의 교회에서 전승기원 미사제를 엄숙히 거행하기로 되었다”고 보도합니다.

매일신보는 이 기사도 모자라 <1만원을 헌금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서>란 기사를 같은 면에 추가로 보도합니다.

기사에는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서는 금년 봄부터 헌금을 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1전씩을 모았는데 그게 벌써 1만원에 달하였음으로 금번 신도결전대회를 기하야 군 애국부에 헌납 수속을 취하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지도자로 전쟁체제에 협조

 

1941년 매일신보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일본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을 기화로 1940년 전면적인 전쟁체제로 돌입합니다. 위에 언급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우연맹’은 1940년부터 태평양전쟁 종전 때까지 활동했던 가톨릭의 전쟁협력 단체입니다.

암울했던 시절 미친 일제국주의의 폭압속에 원치않은 비자발적인 행보였겠지만 위 기사에 언급된 내용이라면 전쟁체제에 협력하였다는 것은 결코 부인하기 힘듭니다.

이번 기사에 다룰 인사는 1920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20년 가까이 충북 음성군 감곡면 면장을 지낸 남상철씨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 직원록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남 씨는 1920년부터 1936년까지 감곡면장을 했고 이어서는 충북도회의 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1942년부터는 일제의 전쟁에 협력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까지 올랐습니다.

일제감정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2년 조선쇼와5년 국세조사기념장, 1935년 10월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습니다.

이쯤 되면 관직은 면장에 불과했지만 알짜배기 친일인사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남상철씨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작성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는데 관료부분이 아닌 천주교 부문의 친일인사로 포함됐지요.

 

과연 비자발적 친일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당시 천주교서울대교구는 “전쟁 마지막 시기 종교 등 각 단체 책임을 진 인물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만든 총동원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남상철씨가 형식적으로 단체에 속했을 뿐 적극 협력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거죠.

하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의문이 갑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남상철 씨는 1937년 8월 충청북도 정보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해 충청북도 진천·광혜원·음성·원남·괴산·연풍 등지에서 강연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충청북도 도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반에 참여해 충북도내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습니다.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북도연맹 ‘참여(’參與)를 맡고 1939년 6월 음성군 감곡면 면협의회원을 겸했습니다.

1940년 11월 열린 기원(절)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기원절’은 일본의 제천절과 같은 날입니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충청북도 위원으로 참여했고, 9월 임전태세의 정비·강화를 목적으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음성)으로 참여했습니다.

1943년 10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주최하는 징병제 관련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장연·신천·제천 등지에서 일제를 옹호하는 강연을 했습니다.

1944년 2월 8일부터 3월 7일까지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보도특별정신대(報道特別挺身隊)에 참여하여 전라북도 옥구·김제·부안 등에서 순회강연을 했습니다. 1945년 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경기도 시흥·수원·평택·안성 등지에서 강연했습니다.

이쯤 되면 전쟁마지막 시기에 불가피하게 친일행위에 가담했다는 천주교서울대교구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인 충북 음성군 감곡면사무소 부지에는 지금도 감곡면장 남상철의 송덕비가 우뚝 서 있습니다.

삼일절이 지나도 광복절이 지나도 여전히 서있습니다. 설립년도를 알 수 있는 일제연호가 새겨진 부분이 쪼아져 알아볼수 없는 상태로 말입니다.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남상철(南相喆)

1920년~1936년 : 충북 음성군 감곡면장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충북도회 의원

 

<기타>

1925년 감곡면농회 회장

1930년 감곡금융조합 조합장

1942년 국민총력천주교연맹 이사장

 

<수상>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32년 조선쇼와5년 국세조사기념장

1935년 10월 시정25주년 기념표창

김남균 기자  spartakoo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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