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 북이면사무소에 조선총독부 군수 지낸 오영전 기념비 보전북이면, “친일관료 비석없다” 답변…오, 20 여년간 군수‧면장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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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충청북도 11개 시군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습니다. 각 시‧군에 속한 읍‧면 사무소에 일제강점기 시절 군수나 면장을 지낸 인물들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거나 공덕비 같은 것들이 있는지 공개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청주시 청원구에서는 각 읍‧면사무소에 확인과정을 거쳐 일제강점기 시절 총 3명의 면장 사진이 사무소에 게시되어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내수읍 사무소에 이규필(1938년 4.2~1945.8~15), 오창읍 사무소에 정운회(1923.1.1.~1924.8.1.), 김규빈(1933.10.31.~1945.8.14.) 등 조선총독부의 면장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지난 3일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사무소에 들렀습니다. 답변대로 북이면 사무소에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관료의 잔재가 없는지 확인해 보기위해서 였죠.
북이면 사무소 2층 로비에는 역대 면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사진이 눈에 띕니다. ‘초대(면장) 이규필(1948.8.31.~1946.2.5.)’이라고 표시된 인물입니다.
이규필은 누굴까요? 바로 <부끄러운 충북의 친일잔재 답사기> 열아홉번째 편 <‘악정(惡政)’ 펼친 일제면장 사진 걸어놓고 초대면장 추앙>에서 소개한 조선총독부 내수면장 이규필과 동일인물입니다. 물론 사진도 똑 같습니다.
이규필의 사례는 일제에 부역한 조선총독부의 관료가 해방이후에도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대한민국의 관료로 승승장구했다는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절 기념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너무나 실감납니다.
저 비석은 뭘까? 아는 사람이 없네!
청주시 북이면 사무소 부지를 살펴봤습니다. 면 사무소 귀퉁이에는 6‧25참전용사에 대한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그 뒤로 성인 가슴높이 까지 되는 비석 하나가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종칠위오공영전기념비’(從七位吳公永田記念碑)라고 적혀있습니다. 풀이하면 ’종7위에 오른 오영전 공의 기념비‘가 됩니다.
뒷면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관료면 대부분 직책이 남아있는데 직책은 없고 ‘종7위’ 라는 비문만 있는데 과연 비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궁금증은 두 가지 힌트를 가지고 금새 풀 수 있었습니다.
우선 비석의 양식이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비석과 겉 모양이 똑같습니다. 두 번째는 비의 건립시기를 알려주는 곳의 글자 두 개가 쪼아져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2월 28일 보도한 <‘악정(惡政)’ 펼친 일제면장 사진 걸어놓고 초대면장 추앙> 기사에서도 이와 같은 사례를 보도했는데요. 충북 청주시 오창초등학교에 보전돼 있는 조선총독부 북일면장 김규빈의 비석도 일제의 연호인 ‘소화’란 글자가 쪼아져서 알아 볼 수가 없게 돼 있었습니다. 이쯤되면 오영전 이란 사람이 일제시대 벼슬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은 대략 분명해졌습니다.
‘종7위’, 기차 2등칸 이상을 타는 일제 고등관을 지칭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사실상 최고위 간부
고등관 부인은 ‘옥상’, 판암관 부인은 ‘오카미상’이라 별도로 불려
오영전 (吳永田, 1866~)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니 조선총독부 시절 그의 관직 경력은 화려했습니다.
<조선총독부소속관서직원록>에 따르면 오영전은 1910년 문의군수(현 문의면, 당시 충북도는 18개 시군으로 구성돼 있음)로 나옵니다. 조선총독부관보를 확인해보니 1914년 3월 5일자로 군수직에서 면직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대한제국 직원록>에 따르면 오영전은 조선총독부의 군수가 되기전에 대한제국의 관료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1908년 오영전은 농상공부 본청 ‘대신광반 문서과 주사’였습니다.
1910년 병합 직전 충북의 18개 군의 군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청주 신창휴, 충주 서회보, 청풍 김기계, 괴산 심규택, 보은 신태완, 옥천 신현구, 문의 오영전, 진천 권병필, 청산 이관구, 황간 김홍규, 영동 임연상, 청안 이탁응, 제천 정내현, 단양 경훈, 음성 목원학, 영춘 원대규, 회인 박초양, 연풍 조두환.
이들은 대한제국의 군수였지만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의 군수 자리를 단 한명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개설과 함께 이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군수로 변신한 것이죠.
오영전은 이때 군수가 되면서 1910년 10월 26일자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종7위’의 직에 임명됩니다. 이런 사실은 조선총독부관보에 기재돼 있습니다.
오영전이 자리에 오른 ‘종7위’라는 조선총독부의 관직은 어떤 자리일까요?
박한용 전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종7위’라는 직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조선인 관리가 최상위에 오를 수 있는 자리는 대체로 고등관(지금의 사무관에 해당한다)인 군수였다.(중략) 고등관이 되기만 하면 그 아래인 ‘판임관 관료’가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일거에 보장되었다. 고등관과 판임관의 구별은 매우 엄격해 고등관은 ‘사족’ 취급을 받았고, 판임관은 일반 평민과 신분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고등관은 기차를 타더라도 3등칸이 아니라 2등칸 이상을 탔으며, 고등관의 부인은 ‘옥상’이란 일본 칭호가 붙었고, 판임관의 부인은 ‘오카미상’으로 불렸다. 한마디로 특권층이었다. 군수를 포함한 조선인 고등관이야말로 지위나 직무상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핵심적으로 가담한 부류였으며, 이들의 협력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는 불가능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 경향신문 2010.815 / 기사제목 : 부끄러운 역사 친일 ‘미완의 청산’)
1914년 2월 28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 따르면 오영전은 1914년 3월 5일부로 군수직에서 면직됩니다.
하지만 이후 1919년부터 1931년까지 북이면장을 수행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제천절에 해당하는 기원절에 표창을 받기도 합니다. 또 1927년부터 1933년여 까지 내수금융조합장을 지내기도 합니다.
지난 3월 1일 청주시 북이면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손병희 선생 생가에서 진행됐습니다.
1919년 당시 오영전은 북이면장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각 지역 면장 등을 앞세워 ‘자제단’, ‘자제회’등을 만들어 3‧1만세운동 지도부와 참여자를 밀고하게 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과연 오영전이 3‧1 만세운동에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면 과연 1931년까지 면장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요?
100주년을 기념하는 3‧1만세운동의 함성은 북이면에서도 재현됐지만 면사무소에 버젓이 보전되고 있는 ‘(조선총독부) 종7위 오영전 기념비’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오영전(吳永田)의 행적
<대한제국직원록>
1908년 농상공부 본청 대신관방 문서과 주사
<조선총독부소속관서직원록>
1910년 청주군 문의군수
1911년 청주군 문의군수
1912년 청주군 문의군수
1913년 청주군 문의군수
1919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0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1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2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3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4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5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7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8년 청주군 북이면장
1929년 청주군 북이면장
1930년 청주군 북이면장
1931년 청주군 북이면장
<경제관련 :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27년 내수금융조합(內秀金融組合 : 설립일 1927년 3월 31일)) 대표
1929년 내수금융조합(內秀金融組合) 대표
1931년 내수금융조합(內秀金融組合) 대표
1933년 내수금융조합(內秀金融組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