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문화연대, 간도특설대 창설 충북출신 이범익 응징 ‘단죄문’ 설치충북 친일인사 상당수, 때론 문학가로 성현으로 둔갑해 문화유적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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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아라리촌에 설치된 친일 거물 이범익에 대한 ‘영세불망비’와 정선문화연대가 설치한 ‘친일거물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아라리촌에 정선문화연대가 설치한 ‘친일거물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

그의 이름은 기요하라 노리에키(淸原範益). 관직은 일제하 중추원 참의, 강원‧충남도지사, 만주국 겐다오(간도)성 성장. 그에겐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이범익(李範益, 1883~?).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이범익은 충북 단양출신으로 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졸업했다.

외국어학교 부교관으로 있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 통역으로 참여했다. 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 군수를 8년간 역임했고 도 참여관, 강원도지사, 충남도지사를 역임했다. 이때 일본정부로부터 서보장을 받았다. 이밖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동약척식회사 감사, 만주국 간도성 성장, 만주국 국무원 참의를 지냈다.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고문으로서 재만 항일세력의 탄압에 압장서기도 했다. 특히 1938년 12월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특수 목적을 가진 간도특설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가 만주국 성장으로 있으면서 제안한 간도특설대의 악명은 이루 말할수 없다. 조선인이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를 때려잡는 간도특설대.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간도특설대가 살해한 항일운동가와 민간인은 172명에 이른다. 이보다 더 악랄한 친일이 어디 있을까!

1942년 5월 일제가 징병제 실시를 결정하자 만선일보에 ‘조선인 최대의 감격, 영예 완수에 최선을 다하자’는 환영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

 

1932년 친일파 김택림 정선군수가 또 다른 친일파 이범익 당시 강원군수에 아부용으로 세운 '영세불망비'

친일청산의 미완의 역사는 이범익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광복후인 1949년 3월 이범익은 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지만 그해 8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50년 8월 한국전쟁당시 납북됐고 그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끝날 것 같던 이범익. 하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고 ‘영세불망(永世不忘)’ 즉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존재로 두 번 나타났다.

첫 번째 등장은 같은 친일파의 손에 의해 등장했다.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

도대체 누가 이런 비석을 세웠을까? 이 비는 이범익이 강원도지사로 재직할 당시인 1932년 그의 휘하에 있던 정선군수 정선군수 김택림(金澤林, 창씨명 金光博, 1888~?)이 세웠다.

비석 앞면에는 ‘강원도지사 이범익 각하 영세불망비’라고 새겨져 있고 뒤에는 그를 추모하고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대략 “(친일파 이범익이 강원도지사로 부임해) 백성 위해 노고하며 사랑으로 돌보기를 다하셨다. 동쪽으로 오력사를 파견하여 사통팔달 뚫리었고 십만 거금으로 밑천 들여 자본으로 도와주었다. 우리 백성 편의하니 이로부터 넉넉하고 풍성해져 많은 사람 칭찬하니 두터운 은혜 영원히 칭송하네” 이런 내용이다.

현재 이 비는 정선읍에 조성된 ‘아라리촌’에 있지만 원래는 정선군청 내에 설치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김택림은 왜 이런 비석을 세웠을까? ‘정선문화연대’에 따르면 1930년대 정선군 화암면엔 전국 5대 금광에 속하는 견포광산을 비록해 많은 금광이 있었다. 대부분 일본인들이 소유‧운영했다. 때문에 화암면은 정선군에서 전기가 가장 먼저 가설됐다.

‘정선문화연대’는 1932년 경 도지사 이범익은 화암면 일대 금광에 필요한 기간시설을 만들거나 외부로 금을 쉽게 실어 나를수 있는 신작로를 개설하기 위해 거금 10만원은 지원한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정선군수 김택림은 이와 같은 이범익의 친일 행적을 칭송하기 위해 불망비를 세웠다. 친일파가 친일파를 칭송하는 아부의 극치였다.

사실 김택림도 이범익 못지 않은 친일파다. 평양 출신인 김택림은 16세 되던 해인 1904년 평남 중화군 사립 일어학교 특별과를 졸업했다. 1930년 5월 강원도 정선군수에 임명돼 1933년 5월까지 만 3년간 재직했다. 군수 재직 중 그는 일제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6년 강원도 통천군 순령면장에 임명됐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공출, 군사원호, 국방헌금품 모집 등 전쟁지원 업무를 적극 수행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3년 3월 강원도 통천군민들이 모금하여 구입한 애국기 '통천호' 헌납식 때 통천군수와 함께 헌납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강원도 정선군과 정선문화원이 설치한 '아라리촌' 비석군 설명

현재 이범익 영세불망비는 정선군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관광지인 ‘아라리촌’에 다른 17개의 공덕비와 영세불망비와 함께 옮겨져 있다. 정선군은 이에 대해 “지난날 이 고장의 향현과 선정을 베풀었던 방백과 군수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으로서... 1976년 비봉산 중턱에 이전하였는바 외딴 산속으로 문화유적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라는 주민들의 여론에 따라 정선군민과 관광객이 자주찾는 아라리촌으로 이전 건립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친일파가 친일파의 비를 세우고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후손들의 정부는 ‘문화유적’으로 승격시킨 셈이다.

 

 

또 다른 진짜 영세불망비

 

“세월이 흘러 이 불망비가 먼지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이범익과 김택림의 친일행각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거물친일파 이범역 영세불망비 단죄문 中)

그렇게 ‘영세불망’ 할 것 같았던 이범익의 비석 옆에 2013년 진짜 ‘영세불망비’가 나타났다. 2013년 ‘참된세상을 여는 정선문화연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이범익의 영세불망비에 ‘거물친일파 이범익 영세불망비 단죄문’을 세웠다.

단죄문에는 이범익의 사진과 함게 이범익‧김택림의 친일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선문화연대는 “이범익의 영세불망비가 있으매 당장이라도 철거하고 싶은 마음 크지만 이 역시 우리가 품어야 할 아픈 역사임에 이 자리에 고이 두고자 한다”며 “친일 반민족 역사의 중요한 현장으로 남길 바라며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과 후세들을 위한 친일교육 현장과 연구자료로 활요되길 소명한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단죄문으로 친일파에 대한 ‘영세불망’의 기억은 이뤄질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거리가 멀다.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의 6촌인 이해용. 일제때 진천과 음성군수를 지낸 이해용은 1919년 4월부터 5월까지 경기도 강화지역에서 발생한 3·1운동 관련자들을 심문하고 1940년 4월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존성비가 2곳에 설치돼 있어 추앙을 받았다. 비단 이해용만 아니라 충북지역엔 친일인사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가 적어도 수십곳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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