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서의 자유를 허하라”며 파업한 청주의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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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독서의 자유를 허하라”며 파업한 청주의 노동자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9.03.24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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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청주군시제사공장 300여명 동맹파업
조선인차별과 남성35명해고에 항의, 여성300명 파업
5개조 요구안 제출…그해 12월, 2개월 파업으로 연결
자료사진 :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군시제사주식회사청주공장의 후신인 남한제사주식회사에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노동장면

1928년에 계획돼 1929년에 지어진 군시제사주식회사 청주공장은 해방때 까지도 청주의 가장 큰 공장이었습니다.

해방이후에는 군시제사주식회사를 불하받은 남한제사주식회사로 이어졌고 대농을 비롯한 여러 방직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청주는 방직산업의 도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앞선 기사 <뽕나무는 죄가 없겠지만…수탈의 잔재, 청주군시제사 공장>이란 기사에서 당시 일제의 양잠사업과 이를 통한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나이는 13세부터 18세까지의 어린 여성이 대부분이었고 매일 11시간 40분의 가혹은 노동을 수행했습니다.

온통 먼지가 날리는 작업환경 속에서 12시까지 일했지만 임금은 최고 70전, 최하 15전으로 평균 25전에 불과했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군시제사 청주공장의 노동자들은 1931년 10월 9일 하루파업, 그리고 1932년 12월 20일 시작해 1933년 2월 말까지 2개월 동안 이곳의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을 진행했다고 했습니다.

 

“조선인은 주임 밖에 될수 없다는 모욕적 언사의 이유는 무엇인가?”

 

1932년 2월 7일 중앙일보에 보도된 군시제사청주공장의 파업관련 기사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1932년 1월 31일 시작된 군시제사 청주공장의 파업의 이유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에서 비롯됩니다.

1932년 2월 7일 중앙일보는 군시제사청주공장의 파업에 대해 상세히 보도합니다. 이에 따르면 그해 1월 31일 오후에 청주제사공장 남녀 직공(노동자) 300여명은 공장측에 5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파업을 단행합니다.

중알일보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4년 전 공장이 청주에 설립된 이래 직공(노동자)의 해고가 너무 빈번하고 작업방해라는 이유에서 공장에서 규정한 독서시간 (1일에 한시간)에 공장내에 비치한 서책 외에는 일제 독서를 엄금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직공들에 대한 대우는 잘못됨으로 항상 직공들은 불만과 불평이 쌓여(왔다)”고 배경을 설명합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곳의 노동자들은 1931년 12월 26일 직공들의 집회인 요생회에서 5개의 요구조건을 제출합니다.

첫 번째 요구는 “해고를 빈번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공무주임의 평상 언급 중 조선인은 계주임 밖에 될수 없다는 모욕적 언사의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되묻습니다.

두 번째는 ‘장장’(공장장)의 말은 3개월 후면 일정한 직급이 된다 하였으나 조선인을 이를 적용치 않고 일본인에게만 적용하는 것을 문제삼습니다.

세 번째는 노동자(직공)가 병중에 있을 경우 일본인에게는 미음을 주나 조선인에게는 현미밥을 주어 차별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지금의 현미밥은 건강식으로 보이겠지만 당시 상황에서 노동자에게 쌀밥을 주었을리 만무한 상황에서 ‘거친 잡곡밥’으로 이해됩니다)

네 번째로 “공장내에 비치한 서적 외에 독서의 자유를 허락할 것”을 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기계가 고장나 업무시간에 조금이라도 일을 못하게 될 경우 정해진 업무시간외에 연장근무를 시키는 것을 철폐하라고 주장합니다.

 

“남성 노동자 35명 해고돼 쫓겨나자 300여명의 여성노동자 울음바다”

 

군시제사공장 노동자들은 이같은 요구조건을 회사에 제출합니다. 하지만 군시제사주식회사 측은 노동자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회사는 토의할 것도 못된다고 결정한 후에 남자직공(노동자) 35명의 행구를 가마니에 담아 공장마당에 내다버려 놓습니다.

그리고 남자 직공들이 일하고 있는 남자 요생사에 출임을 엄금하고 동시에 전부 해고를 명하고 내쫓습니다.

중앙일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와 같이 공장측의 해고를 받고 퇴사하는 남자직원 35명을 보내는 여공 300여명은 일제히 뜨거운 눈물을 흘리어 공장내외에는 곡성이 진동하여 때 아닌 처참한 광경을 보였다한다”고 보도합니다.

해고된 남성노동자들은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키 위해 조금이라도 굴하지 않고 싸우려 한다. 지금 일본에 있는 본사에 타전하였다. 청주공장의 무리한 처단은 차마 견딜 수 없다. 10일간 휴업인 관계상 다시 취임일이 오면 교섭을 개시하여 우리가 희생을 당하더라도 직공인 우리노동자의 인권과 당면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직공들에게 인식시켜 주련다”며 강한 어조로 의지를 드러냅니다.

당시 파업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역할을 했던 매일신보는 짧게 보도합니다. 매일신보는 1932년 2월 1일자 <청주제사 남녀공 삼백여명이 맹파(동맹파업의 준말)>란 제목의 기사에서 31일 청주제사공장 남녀 노동자 300여명이 5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출하고 동맹파업에 들어갔다고 보도합니다.

그러면서 파업의 이유는 남자직공 35명을 무단해고를 한 것이 원인이며 요구조건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최근에 와서 사원의 퇴사(해고) 도수가 너무 잦은 것과 독서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노동자들의 파업 때마다 제압나선 일제경찰

 

일제강점기 일본기업들은 일본인과의 부당한 차별,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선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과 같은 행동 때마다 조선총독부의 경찰을 내세워 탄압합니다.

1932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진행된 군시제사주식회사 청주공장의 파업에도 청주경찰서를 비롯해 인근 경찰서까지 동원해 탄압해 나섭니다.

일제 경찰은 공장을 에워싸고 외부와 차단하고 선동자를 잡겠다며 노동자들의 집까지 일일이 찾가 체포합니다. 접근배후 조종자가 있다며 그들을 잡겠다며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런 사례는 군시제사주식회사 청주공장 뿐만이 아닙니다. 중앙일보 1931년 12월 22일자 보도에 의하면 당시 충북 영동군에 있는 영동상회 노동자들이 12월 18일부터 파업에 들어갑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 영동경찰서는 파업대표자 8인을 체포해 취조를 합니다. 나머지 노동자는 “우리도 검거해달라”며 체포된 노동자의 석방을 요구하지만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동아일보 1932년 10월 1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청주중선운송주식회사 노동자 60명이 임금삭감 문제로 파업을 진행합니다.

조선총독부 청주경찰서는 노동자 등 60명을 소환해 조사를 벌입니다.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여러곳에서 발생합니다. 부산일보 1918년 9월 6일자에 기록된 괴산 금광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1926년 음성주류제조자 동맹파업, 1929년 충주 소천제사공장 여성노동자 파업, 조선운수주식회사 충추출장소 마차부 파업, 1932년 충주중선주식회사 노동자들의 파업, 1935년 충북 진천 임상옥 정미소 노동자들의 파업등이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990년 군사독재정권 까지는 노동자들이 헌법에 명시된 파업이라도 할 경우 불온한 배후가 있는 것처럼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찰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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