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을 “불령도배의 경거망동”으로 비난한 민영은 묘, 결국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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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 “불령도배의 경거망동”으로 비난한 민영은 묘, 결국 이장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9.03.11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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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후손, 청주시 당산공원에 있던 묘 2017년경 조용히 옮겨
청주자제회 등 친일행적도 도마, 후손 토지반환소송도 도마
국유지인 청주시 당산공원에 설치된 친일파 민영은의 묘가 2017년경 다른곳으로 이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2017년 이전되기 전의 민영은 묘소 전경
3월 11일 현재 청주시 당산공원에 있던 민영은 묘소 전경

 

 

불령도배(不逞徒輩)란 단어가 있습니다. 요즘은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불령’이란 현재의 정치나 사회제도에 대해 불평을 갖고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배’란 무리란 뜻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청주자제회의 출범을 알리는 매일신보 기사

올해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은 해입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고,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를 계승했다고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을 부정하면 결국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3·1운동에 참가한 지도부를 ‘불령도배’라 부르고 만세시위를 ‘경거망동’이라 비하한 단체와 인물이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 매일신보가 보도한 청주자제회 회칙

 

이들은 심지어 만세운동을 조직하거나 참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일제 경찰에 밀고해야 한다는 회칙까지 두었습니다.

그 단체의 이름은 ‘청주자제회’. 1919년 4월 15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청주에서 ‘청주자제회’ 결성 소식을 자그마치 세꼭지나 보도합니다.

매일신보는 우선 “3·1독립운동을 억제하고 한일 양 국민의 상호융화를 목적으로 하는 자제회가 청주에서 조직되었다”며 “발기인은 청주유지 민영은, 안동정, 원광한, 방선혁, 한성교 등”이라고 보도합니다.

이어진 기사에서는 결성배경과 목적을 설명합니다. 매일신보는 “(청주자제회는) 근자 각지 소요(3·1운동을 지칭)로 인하여 불온한 거동이 종종 나타날뿐 아니라 사상자(가) 많다하니 실로 유감이라 하니할 바”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사상자 중에는 혹은 진짜 불령도배도 있을지나 일부는 온전히 다른 사람의 유혹이나 협박에 여하야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라며 “.불령도배가 조선독립을 운위하고 혹은 문서로 간접으로 양민을 유혹 협박하고 있다”는 취지에서 자제회 설립취지를 설명합니다.

매일신보는 마지막으로 ‘청주자제회 회칙’을 보도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가관입니다.

이에 따르면 제1조는 “본회는 내선인의 융화를 도모하고 겸하여 경거망동에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상함이 없기를 상호 자제함으로써 목적으로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2조는 가입대상을 규정하고 있는데 “본회원은 금회의 소요(3·1운동)를 진제(鎭制:진압하고 자제함)하고 양민을 보호하며 불령도를 배제함에 힘쓸 자로 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제회의 행동강령, 3·1운동 지도부와 참가자를 밀고

 

제3조는 행동강령에 해당합니다. 이에 따르면 “본회원은 군내 각호에 취하여 단단히 그 경거만동을 경계하고 불령도배의 유혹 또는 협박에 불응하고 만일 불온한 행동을 감히 하고자 하는 자가 있음을 발견할 시에는 곧바로 이를 경무 관헌에게 통지케 할 자로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 나라 제 동포를 밀고하겠다는 것인데 이쯤 되면 조직폭력배 보다 더한 행동강령입니다. 이들 조직은 조선총독부의 비호아래 청주뿐만 아니라 충북도내 각 읍면리까지 촘촘한 조직망을 갖춥니다.

우선 청주자제회는 사무실은 당시 청주군청에 두고 각 면에 지부를 설치했습니다. 청주자제회를 중심으로 그해 8월까지 충북 각 군에 조직을 완성합니다. 이들 조직에는 청주에서 2만여명 등 충북도내에서 7만여명을 가입시키고 3·1운동의 확산을 저지합니다.

 

청주자제회장 민영은 그는 누구?

 

민영은(閔泳殷, 1870년~ 1943년 12월 20일)은 우선 일제시대 충북도내에서 1·2위를 다투는 손꼽히는 대지주였습니다.

해방직후 충북도내 대지주 현황은 이승우씨(수필가·전 충북도운수연수원장)가 ‘도정 반세기’에 인용한 서울대 논문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방후 농지개혁 과정에서 ‘충북도내 20정보이상 피분배 지주 명단’을 보면 김원근·영근 형제가 설립한 학교재단 ‘대성학원’이 401정보로 가장 많았습니다.

이어 국가 봉토가 많았던 충북향교재단 183정보, 민영은의 아들 민주식씨 129정보, 청원군 오송리 이용구 116정보, 민영은 장손자인 민병철씨 105정보, 민영은이 설립한 은성장학회 88정보 순으로 집계됐다.

여기에 손자 민병각, 민병혁씨 피분배 토지까지 합치면 민영은의 후손들이 분배받은 토지는 400정보에 달해 김원근·영근 형제와 쌍벽을 이루는 대지주였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대지주였던 민영은의 친일 행적도 화려합니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청주자제회의 발기인과 회장을 수행했습니다.

민영은은 대한제국의 관리로 공직을 시작합니다. 대한제국 당시 괴산군수와 청주군수를 지냈지만 일제의 병합이후 노골적인 친일행적을 시작합니다. 조선총독부 관선 충북 평의원, 도회의원을 지냈고 나중에 일제의 귀족 작위 다음가는 것으로 알려진 중추원 참의까지 오릅니다.

민영은은 중일전쟁 이후 ‘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고…, 총후(銃後)의 임무를 완성함’을 목적으로 조직된 친일단체 조선군사후원연맹의 지부인 충북군사후원연맹에서 부회장 직을 수행합니다.

매일신보 1937년 8월 18일 <애국기 “충북호” 충북서 헌납결의 민영은씨의 일만원을 필두로 성금 벌서(써) 육만여원>기사에는 민영은 씨가 일제에 1만원을 헌납했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민영은은 이러저러한 친일 행적으로 1935년 일제로부터 ‘조선공로자명감’ 353명중 한 사람으로 기록됩니다.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감’에는 민영은에 대해 "충청북도 청주의 거인으로 충북 제일의 지자(智者)요 인자(仁者)로, 아울러 충북에서 최고의 부호"라는 기재돼 있습니다. 또 일본 천황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되어 천은에 감읍하였다고도 적혀 있습니다.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땅찾기 소송

 

앞서 말했듯이 민영은은 충북에서 1·2위를 다투는 대지주였습니다. 그 땅은 그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대물림됐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12월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민영은씨의 후손에게 증여됐던 토지 일부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환수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2007년 청주지방법원은 민 씨의 후손 4명이 공유하고 있던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109-4번지, 4만274.4㎡에 대한 정부의 반환신청에 대한 가처분을 받아들입니다.

일명 ‘당산’으로 불리는 이 땅은 김경태 전 청주시의원(2007년 당시 상당산성 친일재산환수시민위원회 위원장)이 조사한 결과 민영은이 국유지를 넘겨받은 과정이 석연치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 전 의원이 2007년 당시 확보한 토지원부에 따르면 1920년 국유지였으나 1921년 충북도로 관리권이 넘어갔고 1936년 민영은이 소유권을 차지했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아들이 상속이전했다가 97년 손자 3명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됐습니다. 이에대해 당시 김경태 전 시의원은 충청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당초 국유지였던 땅이 36년 청주신사 건설비로 민영은씨가 2500원을 기부한 해에 소유권이 바뀌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땅은 결국 2010년 4월 9일 국가로 귀속됩니다. 해당 토지 등기부등본에는 등기원인으로 ‘1936년 6월 4일 국가귀속’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936년 민영은 소유로 이전된 것을 원천 부정한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은이 1914년부터 1920년 사이에 취득한 땅에 대해서는 환수대상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은이 일제가 준 직위를 갖기 이전에 취득한 것은 환수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본 것이죠.

토지는 모두 12필지, 1천894.8㎡로 필지당 3.3㎡에서 많게는 709.8㎡ 규모였습니다. 청주 도심인 청주중학교와 중앙초등학교, 서문대교, 성안길, 상당공원 인근에 있는 이들 '알짜배기' 토지에는 현재 도로가 개설돼 있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이 땅을 돌려달라며 청주시를 상대로 제기했습니다. 1심재판부에선 민영은의 후손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하지만 2013년 11월 열린 항소심에선 친일파 후손이 낸 소송을 기각하고 청주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일본이 1904년 대한제국 정부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맺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러일전쟁 이후 친일 행위로 취득한 재산은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 민씨 재산도 국가에 귀속돼야 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습니다.

결국 민영은 후손들이 대법원상고를 포기하면서 소송은 일단락 됐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학생들까지 나서서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이고 많은 시민들이 집회를 개최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국가땅에 남아있던 친일파의 묘, 결국 이장

 

민영은 후손들의 제기한 토지반환 승소를 기념해 청주시민이 세운 동판

그래도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2010년 국가로 귀속된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109-4번지(현 당산공원)에 민영은의 묘가 남아있었습니다.

묘의 크기도 컸을뿐더러 이곳에는 친일전력으로 얼룩진 민복기 전 대법원장이 직접 작성한 비문이 새겨져 있는 비석도 세워졌습니다.

그의 친일행적과 일제때 관직은 없이 대한제국때 까지의 관직만 비석에 새겨졌습니다.

2007년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 분류 재산환수 대상으로 됐을 때 민영은 씨의 후손은 “공원부지내에 있는 큰 할아버지(민영은)와 양부의 묘소를 유지관리해 주는 조건만 충족된다면 언제든 (청주시에)기증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자진해서 묘를 이전할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청주시 당산공원 부지가 2010년 국가에 귀속되면서 일부에선 친일파의 묘를 국가소유의 땅에 두어서는 안된다며 이장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청주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11일 본보 취재진은 청주시 당산공원에 있는 민영은의 묘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민영은의 묘가 있던 자리에 있던 여러개의 석물과 기단, 심지어 봉분까지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확인결과 민영은의 묘는 2017년 어디론가 이전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7년 해당부지에 묘 이장(개장)신고가 접수됐고 그 이후로 묘가 이전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묘 이장(개장) 신고를 받은 청주시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청주시가 공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몰랐을수도 있습니다. 묘 이전을 위한 개장신고는 일선 동사무소에서 전결 처리되는데 이 사실이 청주시 본청으로 전달이 안 됐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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