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혁명 당시 도민들은 왜 면사무소를 습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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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혁명 당시 도민들은 왜 면사무소를 습격했을까?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9.03.15 17: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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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소수‧장연‧대소면 피습…시위대, “면장도 참여하라” 호소
충북지역 면장들 3‧1운동 외면…면 서기 4인은 만세운동 주도
1919년 삼일만세운동당시 충북지역 참가자들은 면사무소와 면장집을 습격하고 같은 조선사람으로 만세시위에 동참하라고 호소했다.

 

“우리 조선 국민도 독립을 하여야 하지 않느냐?” 1919년 4월 3일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가 외쳤습니다. 자리에 있던 800여명의 면민들도 갑자기 울려 퍼진 면장의 호소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따라 외쳤습니다.

이날 덕과면 신양리 뒷산에는 800여명의 면민들이 모여 있었다. 4월 3일은 ‘식수(植樹) 기념일’.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사람들을 모으기 딱 좋은 날이었습니다. 이석기 면장은 오전 나무 심는 행사를 진행하고 오후에는 면민들의 수고를 위로한다고 탁주까지 제공했습니다.

면민들은 이미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 소식도 접하고 있었다. 이웃한 임실군 둔남면의 경우 3‧1운동 초기부터 치열하게 항일운동이 전개된 것도 면민들은 아름아름 알고 있었습니다.

이석기 면장이 제공한 탁주에 주기(酒氣)가 오름과 함께 면민들도 새삼 비분한 기분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이 순간 덕과면장 이석기가 일어나 독립을 외쳤습니다.

 

“내가 (조선의) 덕과면장이다”

 

“역사가 없는 저 몽고(蒙古)(도) 독립을 선언하고 미약한 저 파란(波蘭)도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거든, 신성 자손 아 조선민족이랴! 자에 우생이 면장의 직을 사하고 만강진성(滿腔眞城)을 다하여 조선 독립을 고창(高唱)하옵니다.”

이석기 면장은 이날을 위해 미리 격문까지 준비했습니다. 격문에는 “구(舊) 남원군 덕과면장 이석기”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일제의 면장이 아니라는 것이었죠.

이석기의 호소에 800여명의 면민들이 호응해 외치는 만세소리는 온 산을 진동하게 했습니다. 돌발적인 상황에 현장이 있던 일제 헌병소장은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오히려 함성에 기가 질려 몸둘 곳을 몰라했습니다.

이석기와 면민들은 남원-전주간의 큰길로 나서 헌병분견소를 향해 뚜벅뚜벅 전진했습니다. 행진 도중 사율리에서 길가 오백룡(吳伯龍)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위에서 인용한 ‘경고 아 동포 제군’이라는 격문을 소리높여 낭독했습니다.

헌병대의 움직임도 빨라졌습니다. 금새 무장을 갖춘 헌병대가 자동차로 시위대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석기는 일제 헌병을 향해 “내가 덕과면장이고 내가 다 주동했소.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다음날은 남원 장날이었습니다. 다시 만세시위는 진행됐고 일제헌병은 총을 난사해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후 남원에서는 면장 6명과 면서기 7명이 사표를 내던졌습니다.

 

만세운동 외면한 충북의 면장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삼일운동 참가자(좌)와 피해자들(우측)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이석기 면장외에도 경남 하동군 적량면장 박치화 등 여러명의 면장들이 사표를 제출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충북지역 면장들은 만세시위를 외면합니다. 알량한 권력욕과 일제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세운동 참여자를 밀고하는 ‘자제회’, 혹은 ‘자제단’의 구성원이 됩니다.

이러한 면장들의 행태와 일제의 부역기구인 면사무소에 대해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분노한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면장의 집을 찾아가 참여를 압박하거나 면사무소를 습격합니다.

1919년 4월 2일 충북 음성군 대소면 오유리 뒷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됩니다. 정부의 ‘공훈전자사료관’ 기록에 따르면 이곳의 만세운동은 박병철을 비롯해 민병철(閔丙哲)·박영록(朴永祿)·박제성(朴濟成) 등이 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4월 2일 대소면사무소에는 1천여명의 면민들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해 간 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이 때 면장과 면직원이 시위의 해산을 종용합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두 차례에 걸쳐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의자들을 부수고 기구, 장부 등을 파손시키면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또한 시위를 탄압하는 일경에 대하여 육탄전을 벌여 일경에 중상을 입혔으며, 면사무소를 불지른 다음 뒷산에 올라 밤이 새도록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조선총독부소속관서직원록에 따르면 당시 대소면장은 장성교(張聲敎)로 1924년까지 면장을 지낸 것으로 기록됩니다.

 

만세운동 해산 종용한 대소면장

 

1919년 4월 2일 당시 충북 진천군 만승면(현 광혜원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200여명의 면민들은 면사무소에 찾아갔습니다. 윤병한을 선두로 해서 모인 군중들은 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서기에게 “너희들은 한국 사람이니 같이 군중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라”고 외칩니다. 이들이 거부하자 군중은 혹은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등 시설을 파손합니다.

같은 날 진천군 백곡면에선 수백명의 시위대가 도망가던 남기석 면장을 붙잡습니다. 이들은 강제로 면장에게 태극기를 들게한 뒤 앞장을 세웁니다.

1919년 4월 1일 충북 괴산군 장연면사무소 앞에도 수백명의 군중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면사무소를 부숩니다.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 따르면 이때 파기된 면사무소의 서류가 때마침 강풍에 날려 이웃인 연풍면(延豊面)과 상모면(上芼面)까지 날아갔다고 합니다.

면사무소를 습격한 만세시위군중들은 이후 면장사택을 습격합니다. 조선총독부직원록에 따르면 당시 장연면장은 임준상(林浚相)으로 1930년까지 면장직을 수행합니다.

1919년 4월 1인 음성군 소이면 한천장터에는 장날을 기해 1000여명의 군중이 모입니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소이면사무소로 진출합니다.

‘공훈전자사료관’의 기록에 따르면 면장인 민병식(閔秉植)으로 하여금 시위에 가담케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게 합니다.

특이한 것은 조선총독부직원록에 따르면 1919년 당시 음성군 소이면장은 민동식(閔東植 )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 애국지사 김순길(金順吉)의 공훈록에는 당시 소이면장은 민동식(閔東植)으로 표기됩니다.

충북 괴산군 소수면사무소도 만세시위대에 피습됩니다.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민 500여명은 옥현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갑니다. 그런데 이전 정보가 미래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저지를 받아 중단됩니다. 이날 밤 만세시위대 300여명은 다시 면장집을 습격합니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소수면장은 김승환은 집을 습격한 시위대와 함께 만세를 부른 것으로 전해집니다.

조선총독부직원록에 따르면 당시 면장은 김승환(金昇煥)으로 다음 해 이창규(李昌珪)로 교체되는데 이창규는 1934년까지 무려 15년동안 면장직을 수행합니다.

1919년 4월 3일 음성군 감곡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송석봉은 감곡면 문촌리 응봉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칩니다. 다음날 4일 송석봉은 감곡면사무소 뒤편의 묘포(苗圃)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감독하기 위해 온 면서기에게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합니다.

이 일로 송석봉은 체포되어 1919년 5월 28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선 면사무소에 있던 뽕나무가 불태워집니다. 1919년 4월 3일 저녁 8시경 학산면민 200여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갑니다. 이들은 면민들에게 일제가 강제로 나누어 주려던 뽕나무 2만8000여그루를 뽑아서 태워버립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충북의 면서기

 

광복군 대원들의 서명이 들어있는 태극기(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이에 반해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면사무소 직원들도 있습니다.

충북지역에서 3‧1만세운동을 최초로 시작한 것으로 평가되는 괴산군의 만세운동은 벽초 홍명희였습니다.

1919년 3월 19일 벽초 홍명희 선생은 괴산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거행합니다. 이날 모인 군중만 수천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 장날인 3월 24일 만세운동은 다시 진행됩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벽초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가 주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때 만세운동은 괴산면사무소 서기 구창회(具昌會), 소수면 서기 김인수(金仁洙) 등과 의논하고 거사를 단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본의 재판기록에는 “홍성희와 구창회는 공모하여 3월 24일 괴산 장날에 한국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운동을 하자고 군중을 선동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돼 있습니다.

소수면 서기 김인수에 대해서는 “면서기의 신분이면서 3월 19일경 괴산시장에서 한국독립운동을 하여 괴산경찰서에서 훈계 방면되었다. 24일 다시 홍성희·구창회와 같이 독립운동 중 홍성희가 경찰서에 체포됨을 분개하여 모자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라고 돼 있습니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청주시 북이면사무소 면서기로 있던 김정환은 북이면 신대리 앞산에서 김호상(金浩相)의 주도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합니다.

김정환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됐고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습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호상도 김정환과 마찬가지로 북이면사무소 면서기였습니다.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된 김호상은 1919년 5월 1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돼 1년여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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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인 2019-03-17 08:57:35
친일분자가 빨갱이라는 말은 쓴다는 대통령의 말은 틀린말이다.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 직원이었던 김지태(한국생사)가 토지 2만평을 착취한 친일분자인데 80년대 당시 국가를 상대로 재산 환수재판에 승소하여 국가재산 117억을 환수해 갔다는데 그때 변호인이 문재인이라네! 그러구 노무현대통령시절 김지태는 친일인명사전 명단에서 빼줬다는것, 과연 적폐세력은 누구던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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