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와 의병의 공존…충주읍성의 자기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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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와 의병의 공존…충주읍성의 자기모순
  • 김남균 기자
  • 승인 2019.02.19 17:5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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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탄압하고 읍성허문 서희보 전 충주군수 공적비, 충주관아터에 보존
서희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로 장기간 연임…중추원 부참의까지 올라
충주시 관아공원 전경. 이곳은 조선시대 충주목 동헌이 있던 곳으로 을미의병 유인석 장군이 충주성을 점령해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의병을 탄압하고 충주읍성을 허문 서회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의 공덕비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 김남균 기자)
서회보 공덕비. 충주 관아공원은 조선시대 충주목 동헌이 있던 곳으로 을미의병 유인석 장군이 충주성을 점령해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의병을 탄압하고 충주읍성을 허문 서회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의 공덕비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사진 김남균 기자)

 

“1849년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송암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12월에 영동군수로 재임하다가 충주군수로 전임하였으며, 1908년 3월 공립충주보통학교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충주군수로 있을 때 많은 시설을 만들고 보수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을 잘 보살펴 많은 칭송을 받았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

이렇게 소개되는 사람은 서희보(徐晦輔. 1849~1919)라는 사람입니다. 1907년 12월 31일자로 충주군수에 오른뒤 1917년 1월 23일까지 만 9년1개월 동안 충주군수로 재임한 인물입니다.

<디지털충문화대전>은 충주군수로 있으면서 주민들을 잘 보살펴 칭송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충주관아공원에 가면 그의 공덕비가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충주 관아공원은 조선시대 충주목의 관사가 남아있는 곳으로 충주목의 동헌으로 쓰던 청령현과 제금당 등 유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군수 서 후 회보 선정비(郡守徐候晦輔善政碑)’는 관아공원에 들어서는 입구 왼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희보의 선정비 바로 앞에는 ‘을미의병과 충주성 전투’, ‘충주읍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습니다.

 

의병의 근거지에 세워진 친일파 공덕비

 

충주 관아공원은 조선시대 충주목 동헌이 있던 곳으로 을미의병 유인석 장군이 충주성을 점령해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의병을 탄압하고 충주읍성을 허문 서회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의 공덕비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사진 김남균 기자)
충주 관아공원은 조선시대 충주목 동헌이 있던 곳으로 을미의병 유인석 장군이 충주성을 점령해 일본군을 격퇴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의병을 탄압하고 충주읍성을 허문 서회보 조선총독부 충주군수의 공덕비가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사진 김남균 기자)

 

 

안내판에 따르면 충주성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해 1895년 일어선 을미의병 유인석 대장이 일본군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유인석이 이끌던 ‘호좌의진’ 부대는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의 점령합니다. 이날 유인석 대장의 주력부대는 충북 제천시 박달재를 넘어 일본군과 관군이 지키던 충주성을 공격합니다.

유인석의 부대는 농민들을 포함해 그 규모가 1만명을 넘었습니다. 관군과 일본군은 의병의 공격에 놀라 달아났고 일본군을 끌어들인 죄를 물어 당시 충주부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합니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퇴각했지만 유인석의 부대가 충주성을 장악했던 일군을 물리치고 관찰사를 처단한 것에 대해 친일관료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충주성은 의병과 관련해 상징성이 매우 큰 장소로 평가받습니다.

반면 서희보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요. 서희보는 조선총독부의 충주군수로 있으면서 의병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서회보가 어떤 식으로 의병을 탄압했을까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서희보가 충주군수로 있으면서 당시 내무대신 송병준에게 보낸 ‘귀순자 보고’ 문건이 9편 확인됩니다.

 

서희보, 의병 투항하게 하는 공작에 참여

 

1907년 12월 무기력한 대한제국의 황제는 “지방의 의병으로 앞으로도 계속하여 ‘소요’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처벌하되 성심으로 귀순하는 자는 전죄를 불문하고 안도 악업케 할 것”을 공포합니다. 이는 일본측의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친일관료와 일제는 일제에 협력하는 지주등을 밀정으로 포섭하고 의병내부에 대한 적극적인 공작을 폅니다. 이에따라 의병을 이탈해 관군에 투항한 이들을 ‘귀순자’라고 호칭하고 이들로부터 의병내부의 정보를 캐내 의병을 탄압하는데 이용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 ‘폭도귀순에 관한 건’ 등의 자료를 보면 일제와 친일관료들이 어떻게 공작을 폈는지 알수 있습니다.

의병을 탄압하는 데 앞장선 조선총독부 군수의 선정비가 의병의 근거지에 우뚝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모순입니까?

 

충주읍성 허문 서희보의 공덕비가 충주읍성에

 

서희보의 출세는 충주군수에 머물지 않습니다. 9년1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충주군수를 지낸 것도 모자라 1917년 서희보는 중추원 부찬의(副贊議)에 오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친일중의 친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서희보의 공덕비가 충주읍성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모순인 이유는 또 있습니다.

1912년 서희보가 충주군수로 있을 때 일제는 ‘시구개정’이라는 것을 통해 본격적으로 충주성을 허물게 됩니다. 1913년 9월 14일 매일신보 <충주의 시구개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충청북도 충주는 원래 관찰도 소재지로 충북 북부의 경제적 중심지인데 지금 공사중인 청주로 통하는 2등도로는 곧 완공되겠고 또 서울로 통할 1등 국도도 곧 개통될 터인즉 개통하는 날에는 상당히 번영할 것이나 시가는 뒤섞이어 어지러운 구시가인즉 이번에 북문으로 부터 남문에 통하는 도로를 간선으로 하여 북문에서 남문까지 폭 7.2미터의 간선도로를 놓고, 이 7.2미터 도로 11개, 4.3km 및 폭 5.4미터 도로 3개 1.2km의 도로를 건설함에 지방비의 보조를 얻어 정연한 시가를 조성할 계획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더라”라고 보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충주읍성은 깨지고 또 깨지고 산산이 부서집니다. 서희보의 공덕비 바로 앞에는 충주읍성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습니다.

충주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이유를 들어 서희보의 공덕비가 이 상태로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충주시에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충주시 관계자는 “서희보의 공덕비에 대해 다양한 이견이 있을수 있다”며 “문화재자문위원회 등을 열어 처리방안을 논의하 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양한 이견’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 관계자는 “(친일인사라 하더라도) 공적이 있으니 공덕비를 세운 것 아니겠냐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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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발그만 2019-02-20 00:56:53
진정한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로 살았었다.

정작 입으로만 똥립운동 나불거린 기존 개거지조선 기득권새끼들은 끝까지 살아 남아서 또 남북으로 갈라놓고 6.25로 수백만 동족학살. 그러한 새끼들은 지금까지 위인으로 모심. 또한 그런 기득권 새끼들에 의한 반일교육 선동. 이게 우리 일반 시민들의 시선으로 반드시 기억해야할 역사의 진실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피눈물나는 일반 시민들의 참 역사

씨불그만 2019-02-20 00:55:52
그나마 일반 국민 누구든지 열심히 일해서 부자되신분들 태반. 똥립운똥은 그당시 5% 양반 귀족 기득귄층이 노비들 피빨던 기득권 뺏기기 싫어서 테러짓 주동 시작

ㄴ된것. 그중에 정의감 투철한 청년들 선동해서 그분들만 최전선에서 희생. 그러한 테러단체 외에 90% 일반 국민들은 일본에 큰 거부감이닌 저항감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 덕ㅇ분에 신분 해방과 노력한 만큼 부를 얻고 원한다면 고등 교육을 통해 신지식인층으로 성장하고 더 나아가서 각계각층 문화 예술 체육 정치 경제 수많은.분야에 일반국민들이 진출할수 있는 진정한 국가의 구성원인

씨밝그만 2019-02-20 00:49:57
일제시대는 한민족 처음으로 국토 발전이란걸 해본시대고 보편적인 수혜는 고스란이 일반 국민들 몫. 그전까지 개거지 조선시대 인구의 95% 노비백성들 성과 이름도 없이 거적대기만 걸친 유인원 수준 시절보단 그나마 처음으로 인류 문명을 경험하게한 시대가 일제시대다. 일본에 의한 해방 이전까지 일반 90% 노비 백성들은 5% 양반 귀족층에 피빨리고 짐승처럼 살았을뿐. 일본 덕분에 백성들 신분해방과 성과 이름을 얻게 되었고 교육계몽 및 근대화로 비로소 인간답게 살 권리와 일한만큼 댓가를 얻을수 있는 개혁으로 그나

시민 2019-02-19 21:59:56
다양한의견???
친일파에대한?
5.18에 대한? ㅉ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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