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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정치·행정 비석이 가루가 될 때까지 잊지 말자. 그 이름 친일
일 총독이 극찬…조선 황실 후손으로 일제에 아부한 이태호씨태조 이성계의 장자 진안대군의 후손…괴산 목도초 설립 때 재산희사
이 씨, 조선총독과 교류하며 아부…일제, 왕실후손 강조하며 적극이용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초등학교 세워진 이태호 공덕비. 이 씨는 목도초등학교 모태가 되는 학교 설립당시 일정한 재산을 희사했지만 이후 조선총독과 교류하며 일 황군 전사상자 모금운동을 하는 등 일제에 아부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게 됨에 많은 애국자들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거나 재산을 기우려 겨레를 건지려 하였으니 그때 표적인 것이 3‧1 운동이라 하겠거니와 그 당시 또 하나 이고장의 선각자가 계시었으니 고가 곧 이태호(李泰浩) 선생이시다.

그는 나라를 되찾는 데에는 민족이 오직 배워서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시어 막대한 사재를 희사하고 자기 집까지 내어놓아 학교를 창설케 하였으니 그것이 목도국민학교의 시작이다.

이제 개교 오십주년을 맞이하여 지금은 가신 그분의 공적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지방사람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69년 7월 10일 (괴산 목도초등학교에 세워진 ‘전사 이태호 선생 공적비’ 비문)

 

위 글은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에 소재한 목도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태호공적비 내용입니다. 불정면 목도리는 그 지명 때문에 자주 방송에 소개되는 동네입니다.

비문에 나오는 내용처럼 이태호(1861~1943)씨는 지금의 목도초등학교 설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학대백과대사전>은 목도초등학교에 대하여 “1919년 7월 3일 목도공립보통학교 4년제로 지방 유지 이태호(李泰浩)가 설립을 위해 현금 1000원(당시 쌀 200가마)을 기부하였다”고 소개합니다.

또 “1919년 10월 10일 지역 유지 이태호의 사옥 3층 건물을 차용하여 가교사로 사용하고 1학년 68명을 모집하여 2학급을 편성하였다. 1920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신축교사를 준공하고 이전하였다”고 설명합니다.

1938년 4월 1일 조선교육령 개정이 되면서 교명은 목도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뀝니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초등학교 세워진 이태호 공덕비. 이 씨는 목도초등학교 모태가 되는 학교 설립당시 일정한 재산을 희사했지만 이후 조선총독과 교류하며 일 황군 전사상자 모금운동을 하는 등 일제에 아부했다.

 

이태호는 조선태조 이성계의 장자 진안대군의 후손

 

목도초등학교를 세우는데 자신의 재산을 기부한 사실은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에도 언급됩니다. 거기다가 이태호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19대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태호가 살았던 목도리에는 청덕사(淸德祠)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청덕사는 진안대군 이방우와 그의 장자인 봉령후 이복근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조선왕조가 나중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고 이태호씨도 당연히 대한제국 황실의 자손으로써 나라를 빼앗긴 그 울분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사실과 견주어서 보면 이태호씨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학교 건립에 사재를 희사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황실의 자손으로 일제에 부역한 이태호

 

1937년 9월 4일 매일신보의 이태호씨 관련 기사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의 언론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비문에 새겨진 것과는 다른 정황이 소속 나옵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매일신보는 1937년 이태호씨가 보기드문 ‘황실주의자’이고 중일전쟁 당시 ‘황군장병’의 노고에 감격해 모금활동을 했다고 보도합니다.

매일신보는 1937년 9월 4일 신문에서 <육십세 이상 남녀에게 전사상자 조위금을 모집 /

77세의 괴산 이태호 옹 선두에 서서 대 활동>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선 매일신보는 이태호씨는 조선총독부총독과 기타의 유명한 인사와 알고 친하게 지내고 있는 조선내에서 보기드문 ‘황실주의자’라고 소개합니다.

이어 이태호씨가 지나사변(중일전쟁)이 일어나 황군장벽의 노고에 감격하야 77세의 노골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수 없다면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소개합니다.

매일신보는 이태호씨가 동면내 60세이상의 남녀로부터 ‘황군(일본군) 전사사상자 조위금(위로금)을 모집하고자 불정면장 이지영(李之榮)씨와 협력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노옹(나이든 노인, 이태호를 지칭)의 활동에 일반이 감격하고 있다한다”고 기사를 마무리합니다.

 

“조선총독과 교류하는 조선에서 보기 드문 황실주의자”

 

일제로부터 ‘조선에서 보기드문 황실주의자’라고 지칭된 이태호씨의 행적인 1937년이 최초가 아닙니다.

1930년 11월 14일 동아일보 이태호씨 관련 기사(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1930년 11월 14일 동아일보는 <진안대군의 후예로 독농독학의 발명가 / 농구로 저술로 농촌계발 충북괴산 이태호씨>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시 조선총독이 괴산 이태호씨의 집을 방문해 경의를 표했다고 보도합니다.

같은 날 매일신보도 <총독과 이태호 노인 시여의 간담피력 / 그의 숨온 위대한 공적을 차저 / 일세의 사표될 행적>이라는 기사를 보도합니다.

매일신보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이태호씨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총독이 한시간 이상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매우 만족한 빛을 가지고 나왔다고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이 씨가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칭찬합니다. 매일신보는 “이태호씨는 금년 칠십세의 고령으로 이 태조의 맛 자제분 진안대군의 십판대 후예인데 이태호씨는 세상에 있어서는 드물다 할 만큼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고 또 시대적 지식과 학문에도 훌룡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숨은 학자”라고 강조합니다.

 

 

 

 

1930년 11월 14일 매일신보 이태호씨 관련 기사(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태조 이성계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이용한 일제

 

1930년 2월 14일 매일신보 이태호씨 관련 기사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이보다 9개월 앞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이태호씨를 직접 관저에 불러 오찬을 대접하고 환대를 합니다.

1930년 2월 14일 매일신보는 <고수 총독(皐水總督)의 노유관대(老儒欵待) 관저에 청하야 오찬대접 / 李門(이태호씨 문중)은 거가감격(擧家感激)>이라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내용은 총독 관저에 이태호씨를 불러 오찬을 대접하고 통역관을 시켜 자동차로 데려다 줬는데 이태호씨를 비롯해 그 가문에서는 매우 감격해 했다는 것입니다.

일제가 이렇게 까지 이 씨를 우대하고 매일신보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선왕조의 후손도 일제에 협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부각 시켜려 그를 이용했다는 생각이 지나친 것일까요?

 

인도교(人道敎)라는 신흥종교까지 창시

 

태조 이성계의 장자 진안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청덕사에는 2010년대까지 ‘인도교 창립 기념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창립기념비 까지 있던 것으로 보아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은 이태호씨가 창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지지 않아 사실관계는 정확치 않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인도교(人道敎)에 대해 “증산교의 일파. 1930년 채경대가 전라북도 정읍에서 창립하였다. 상제신앙이며 경전은 '대순전경'을 주로 사용하지만, 미공개된 '개벽경', '구잡비장경'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또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을 살펴보면 일제는 인도교를 사이비종교집단으로 보고 대대적인 탄압을 했던 기록이 확인됩니다.

채경대의 ‘인도교’가 탄압을 받던 시절 이태호씨는 조선총독과 교류하며서 환대를 받았던 만큼 두 종교는 유사성이 없을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또 이태호씨의 인도교창립기념비에 일본인이 참배했다는 소식도 있고 광복 후에 주민이 그 사실 때문에 일부 시설을 파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도교의 정확한 정체를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주민들로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닌 가 봅니다.

이태호씨가 교육기관 설립에 일정 재산을 희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선왕조 황실의 후손으로 일제에 아부한 기록도 분명합니다.

과연 이 씨의 공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3‧1운동’이 언급되거나 “나라를 되찾는데 지름길”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공적비가 학교 교정에 존재하는 것이 경우에 맞을까요?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남균 기자  spartakoo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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