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별 경계선지능인 지원조례 제정 늘어날 전망
조례제정 반갑지만 대상·연령 제한, 임의규정은 한계
범죄피해자·양육시설 거주자 지원은 매우 시급한 문제
‘학습부진’에 매몰되지 않는 일대일·맞춤형 교육 절실
학교급별 교육방법 매뉴얼 및 가이드북 제작돼야
정치인, 시민단체 활동가, 시민들의 관심 필요
자신의 권리 당당히 요구하는 당사자 목소리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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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 10명 중 1~2명’, ‘느린학습자’, ‘사각지대’, ‘장애·비장애의 중간’, ‘은둔형 외톨이’.

지능지수 71~84인 경계선지능인을 일컫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살펴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유아시절부터 성인 이후까지 우리사회 곳곳에 있는 차별과 편견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일부 지자체에서 경계선지능인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와 지원센터가 생겨나고, 인식 또한 확산되고 있지만 한계는 여전합니다.

충북인뉴스는 8회에 걸쳐 경계선지능인들의 학교생활과 성인이후 삶을 조명해보고, 문제 개선 및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합니다.(편집자 주)

 

 

갈길 멀지만 불가능한 건 아냐

경계선지능인 취재를 하며 많이 들었던 말을 꼽는다면, ‘사각지대’, ‘맞춤교육’, ‘장애등급’, ‘지원’, ‘인식개선’ 등이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경계선지능인을 위해 맞춤형 교육과 장애인에 준하는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고, 나아가 복지에 대한 개념 재정립, 시민들의 인식·(법)제도 개선 등 전방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리고 당장 실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차근차근 한다면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부이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들이 있고, 선진외국 또한 수년~수십 년에 걸쳐 지원시스템이 정착되었다.

앞선 보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경계선지능인 지원을 위해서는 우선 법(지자체 조례) 제·개정 또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국가 또는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얘기다. 취재 중 만난 한 복지사는 경계선지능인 청년들의 취업지원을 대기업에 요구했는데, 근거가 없어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법령 또는 조례 등 지원 근거만 있다면 장애와 비장애 경계선에서 설 곳이 없었던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지원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경계선지능인 지원을 위한 지자체 조례는 14개 정도가 있다. 2020년 10월 서울시가 전국 최초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조례(이하 서울시 경계선지능인 조례)’를 제정한데 이어 광주광역시, 서울시 노원구, 서초구, 양천구, 구로구, 경기도 여주시, 고양시 등에서 조례를 제정했다. 특히 고양시 조례는 그 지원대상이 청년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채유미 전 서울시의원.
채유미 전 서울시의원.

 

‘서울시 경계선지능인 조례’를 발의한 채유미 전 서울시의원은 “치매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처럼, 경계선지능인도 마찬가지다. 가정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는 너무 힘들다. 부부간 불화가 생길 수 있고, 형제자매간의 어려움도 생길 수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이런 부분을 해결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자체 조례 제정 반갑지만 아쉬움은 있어

전문가들에 따르면 각 지자체의 조례 제정은 앞으로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있다. 우선 조례 문구에 강제성(‘~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이 없다는 점이다. 지자체장 의지에 따라 지원여부가 갈릴 수 있다는 뜻이다. 또 대다수 조례는 지원 대상을 19세 미만으로 한정시켰다. 학령기 이후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례가 도움이 안 된다는 의미다. 이외에도 여러 지자체에서 조례 제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그 비율은 매우 미비하고, 무엇보다 국회법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아쉬운 점으로 꼽힌다.

이재경 한신대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은 “국회에서 입법이 되어야 강제력도 있고 예산도 큰데 아직 국회에서 입법화가 안 되고 있다. 그리고 전국 지자체 243개 중 경계선지능인 지원조례가 있는 지자체는 14곳뿐이다. 여전히 매우 적은 상황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경계선지능 학생들만을 위한 지원조례가 아닌 생애주기별로 지원할 수 있는 조례 제정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경계선지능인 중에서도 사각지대로 꼽히는 성폭력 등 범죄 피해자와 양육시설 거주자들을 위한 지원 근거마련은 매우 시급하다. 지능지수로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하고, 현실적인 도움이 절실하다. 장애·비장애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독일 등 선진국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전국 최초 경계선지능인 위한 센터 생겨

한편 지난 6월 ‘서울시 경계선지능인 조례’를 근거로 문을 연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지원센터(이하 센터)’는 주목할 만하다. 경계선지능인들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이 기관은 경계선지능인들의 실태파악과 정책 발굴, 인식개선, 나아가 복지관이나 학교 등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과 지원을 네트워크화 한다는 계획이다.

이교봉 센터장은 “인식개선과 실태파악이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계선지능인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지원을 할 것이다. 한 기관의 활동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기관을 연계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영·유아기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아우르는 사업과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지만 우선은 경계선지능 후기 청소년과 청년에 집중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현재는 역할과 위상에 비해 센터 운영비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센터가 경계선지능인 지원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 문제 학습부진에만 매몰돼선 안 돼”

법이나 제도 개선을 떠나 교육환경, 학교현장의 변화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 일선학교에는 이미 2016년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지적능력이 낮은 학생들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되어 있지만 대다수 교육청과 학교는 여전히 ‘학습부진’에 매몰된 프로그램만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 이후 더욱 벌어진 학습격차 줄이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구자들은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을 위해서는 학습부진 뿐 아니라, 학생의 특성을 고려한 꾸준한 맞춤형 지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경계선지능 중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던 서울대 김희은 박사는 “경계선지능 아이들은 그 특성이 다 다르다. 아이의 정서적인 면까지 파악해 일대일 또는 맞춤형 교육이 필요하다”며 “대체로 1년 정도 꾸준히 진행하면 성과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유튜브 '경계를 걷다' 화면 캡처.
유튜브 '경계를 걷다' 화면 캡처.

 

한편 경계선지능 아동 부모이자 특수교사인 진건중학교 이보람 교사는 경계선지능인을 위해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고 있다. 현재 ‘경계를 걷다’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이 교사는 경계선지능 아동들의 특성과 교육법, 부모들의 마음가짐 등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최근에는 ‘함께 걷는 느린학습자 학교생활’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교사는 “경계선지능을 학습부진 영역에 가두면 절대 개선될 수 없다. 경계선지능은 ADHD와 난독증과 마찬가지로 학습부진 현상을 보이지만 그 접근법이 다르다”라며 △1교실 2교사제 △경계선지능 아동에 대한 교사 인식개선 교육 △긍정적 행동지원 및 보편적 학습설계의 활용 △자유학기제와 고교학점제의 적극적인 활용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교사는 또 학교급별 다른 교육법을 강조했다. 즉 초등학교 시기에는 한글과 수세기 등 기초학습에 집중하되 실생활에서 활용 가능한 영역을 연계해 지도하고, 중학교 시기에는 교사와 부모가 한발 짝 떨어져서 아이에게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줘야 한다. 또 고등학교 시기에는 진로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보람 교사는 “빠른 진단과 학교급에 따른 적절한 지원이 중요하다.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을 위한 가이드나 매뉴얼 마련이 시급하다”며 "무엇보다 정서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성공경험을 획득하도록 도울 때 비로소 느린학습자 학생들은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 및 복지기관의 관심 필요

시민단체 및 복지기관의 적극적인 지원과 활동 또한 중요하다.

시민단체와 부모들의 협업으로 이미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느린학습자시민회(이하 시민회)’가 모범적인 사례다.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들의 부모 자조모임으로 출발한 시민회는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 등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조직화의 탄력을 받았고, 이제는 느린학습자들의 인권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수년전부터 경계선지능인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서울시 장안종합사회복지관과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 또한 모범사례로 꼽힌다. 장안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취업을 위해 지역 소상공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냈으며, 지역주민들이 봉사활동을 위한 협동조합을 꾸리는데도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교육청의 혁신교육지구 사업과 연계한 활동도 진행했다.

 

장안종합사회복지관 강상묵 팀장.
장안종합사회복지관 강상묵 팀장.

 

직업교육, 사회성 향상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동대문종합사회복지관은 최근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휘카페’를 창업, 경계선지능청년 자립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서민정 복지사는 “단순 음료판매에서 벗어나 앞으로 상품을 개발해 휘카페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상품을 만들려면 디자인도 해야 하고, 인쇄도 해야 하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휘카페는 청년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거점으로 활용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휘카페’를 경계선지능 청년을 위한 다양한 창업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얘기다.

 

'휘카페'에서 느린학습자 청년들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
'휘카페'에서 느린학습자 청년들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

 

한편 경계선지능인 지원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적극성과 의지’라는 의견도 있다. 서울시 조례를 발의한 채유미 의원은 “정치인들이 경계선지능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정치인들이 경계선지능의 전문가는 아니다”라며 “이제는 부모 또는 당사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히 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는 이보람 교사의 “자신의 자녀에 대해 오픈하고 교사들과 협력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지자체 및 교육계의 관심, 실질적인 지원, 당사자들의 적극성이 맞아 떨어졌을 때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지원은 더욱 확대될 수 있다.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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