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점심 무렵 학교 다녀오는 길. 마당에 들어서며 혹시나 엄마를 불러 보지만 들에 나가 일하고 있을 엄마가 반갑게 맞아줄 리 없었으므로 마당에 쏟아지는 햇살만 무색했다.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부엌으로 들어가 찬장을 열어 보지만 간장 찌든 냄새와 미원 냄새가 오히려 허기를 자극할 뿐이었다. 찐 고구마나 누룽지가 있을지도 몰라 가마솥도 열어 보았지만 검고 깊고 넓은 허기에 어린 마음이 다 무안했다.

하는 수 없이 안방에 들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순식간에 나타난 소복 입은 여자, 검고 긴 머리를 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두 눈에서 피가 흐르는 여자가 어린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당시 매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원혼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화면에서 귀신을 보고 나면 부모 몰래 동생 과자를 뺏어 먹은 일, 부모에게 거짓말을 한 일, 학교 숙제를 못 해가서 선생님에게 혼난 일 등을 떠 올리며 작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 “천벌을 받았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체육관에서 뽑힌 각하가 근엄한 표정으로 “본인은”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나라의 국민은 왜 권선징악의 TV 프로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탐관오리들이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가 초주검을 만들고 곡식과 아녀자를 뺏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대. 법과 제도는 힘없는 백성들에게 공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하늘에 대고 벌을 내려 달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2020년 대한민국은 어떨까. 국민의 법 감정과 법 사이에도 커다란 틈이 있어 보인다. 

최근 사회적 이슈인 ‘n번방’ 사건, 경비원의 안타까운 죽음, 소년법 관련 문제, 자식이나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반인륜 범죄,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는 범죄, 많은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대규모 사기극 등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원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거세다. 

‘형벌’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기회를 제공하는 교화적 측면과 죄에 상응하는 처분으로 범죄를 억제하려는 인과응보의 측면이 공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죄와 벌’의 모습은 국민을 허탈하게 하고 공분을 자아낸 측면이 많다. 감형을 받기 위해 피해자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는 모습.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이것이 인용되는 모습.

우연인지 몰라도 재벌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휠체어나 구급차를 타고 나타나 미리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것에 대해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은 입이 아플 지경이다. 

정의의 여신으로 불리는 디케(Dike)는 눈을 안대로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설마 우리나라의 디케는 안대를 이마에 걸치고 있었나?

‘죄와 벌’은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사안으로 인권, 법 정신, 사회적 합의 등등 고려해야 할 점이 많고 변화도 점진적이겠지만 위정자들이나 사법부는 최근 엄벌을 촉구하는 여론에 대해 증거처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에는 아이를 유괴 살인한 범죄자와 그 아이의 어머니, 하느님을 권하는 집사가 등장한다. 하느님을 의지하고 용서하라는 말에 교도소로 면회를 간 어머니는 절망한다. 그 범죄자는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 없어요.”라고 절규한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피해자와 그리고 국민이 용서하기 전에 자본과 권력 또는 법이 먼저 용서하지 않길 기대하고 싶다. 그러기엔 우리 국민은 너무 성실하게 살아왔다. 벽에 지른 튼튼한 못 같은 법에 식구들의 지친 삶을 잠시 걸어두고 편안히 앉아 따듯한 밥을 나눠 먹는 저녁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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