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지치지 않으셨나요? 요즘 많이 힘드시지요? 쉬고 싶은데 챙겨야 할 사람과 일들이 너무 많지요? 물에 젖은 이불을 두른 것 같았던 여름. 그러나 우린 보란 듯이 잘 지나왔습니다. 모두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 춥고 혹독한 겨울이 올 것입니다. 따듯한 점퍼처럼 마음 두께를 키워야 할 텐데 올가을은 어떨까요? 

 초등학생 딸 아이와 함께 한적한 가을 테두리를 걸었다. 고인쇄박물관이 있는 청주 운천동 주택가 골목도 한참 가을이었다. 집들 너머로 구름이 알맞게 채도를 맞추고 있는 하늘은 한참을 보아도 좋았다. 골목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학교에 가지 못한 딸과 걷는 가을 골목길은 나 자신에게 주는 격려 같았다.

 사실 하늘과 바람과 햇빛이 모두 좋은 가을을 산책하기 위해서 며칠 궁리를 했다.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딸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예쁜 휴대폰 케이스를 만들어 주는 공방이 있다고 넌지시 말해 두었던 참이다. 결국 학교에 가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에만 열중이던 딸이 호기심을 보였다. 서로 품은 생각은 달랐지만 이런 연유로 부녀의 가을 외출이 시작된 것이다.

 ‘운리단길’로 불리는 청주 운천동 주택가 골목.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상승하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떠난 가게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는 다른 가게가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 여러 카페와 식당, 간판은 없지만 아기자기한 필기류나 문구류를 파는 문방구, 디자인 팬시를 직접 제작하는 공방, 독특한 식물을 취급하는 꽃집 등 저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이 기존 건물에 문을 열고 있어 살펴보기 좋았다.

 딸은 고양이 스티커 한 묶음과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핸드폰 손잡이 하나를 손에 쥐고 기뻐했고 필자는 올리브 나무 묘목을 하나 샀다. 가지에서 삐죽삐죽 자란 진녹색 잎을 가진 올리브 묘목을 키우며 지난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담담히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을인데요. 여러분의 가을은 어떠세요? 하늘 올려 볼 틈도, 숨 쉴 틈이 없어도 ‘나’를 살펴봐야 해요. 힘들면 어느 정도 힘든지, 정작 왜 힘든 것인지, 그냥 놓아 버려도 되는 것은 더 없는지. ‘나’를 마주하지 않으면 점점 더 어색해져서 정말 ‘남’처럼 될 수도 있어요.

 성실한 우리 국민은 ‘나’를 생각하기보다 가족이나 직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별도리가 없었던 세대도 있었고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운 자식들은 또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린 세상의 속도에 뒤처질세라 매 순간 긴장하며 버둥거렸던 일상에서 갑자기 원치 않는 변화가 생겨도 성실하게 쉴 수 있을까. “내가 건강해야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의 ‘건강’은 육체적 건강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서야 그 ‘건강’이 ‘나’에 대한 탄력, ‘나’에 대한 친밀도까지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올가을에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 쉴 짬을 주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잘 살았다고, 잘 해왔고 잘할 것이라고 ‘나’를 격려해 주자. 지금까지 너무 숨 가쁘게 달려왔다면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보는 것도 좋겠다. 혼자 걸어도 좋고 같이 걷고 싶은 사람과 걷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낮이든 저녁이든, 출근길이나 퇴근길, 점심시간 잠시 짬을 내도 좋다. 일단 걸어보자.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자. 우연히 담장 아래 봉숭아를 발견하고 옛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참 좋은 시간. 혼자 있어도 누군가와 함께 여도 참 좋은 시간. 많은 것을 잃어버린 가을이지만 그래서 더 오롯하게 가을일지도 모른다. 하늘과 바람과 햇빛이 모두 좋다. 마음이 감처럼 노랗게 물들면 앞으로 몇 년 힘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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