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직장에서부터

묶음기사

회사라는 생활공간에만 들어가면 민주주의는 마치 블랙홀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다른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일종의 치외법권 상태랄까. 새로운 국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회사나라의 헌법을 말하자면 이렇다. 이곳은 돈이 주인이 되는 국가이며(제1조), 주권은 자본가인 사장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사장으로부터 나온다(제2조). 동료 인간이자 시민인 사장은 회사 문만 들어가면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다. 그 다음 권력자들은 사장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임원들과 중간관리자들이다. 일선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온 ‘이민자’로서 이 나라의 '법'인 사장님 말씀만 잘 들으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는 입사할 때 근로계약서를 서면으로 쓰고 1부씩 교부하도록 되어 있으나 회사나라에서는 근로계약서를 쓸 필요 없다. 쓰더라도 계약서는 사장님이 관리해 준다. 근로계약 내용에 대해 바깥 나라 법 조항을 들고 와서 사장한테 하나하나 따져 물어보면 입국 허가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근로자 대표’라는 사람이 사장님과 만난 뒤에 연중 공휴일을 모두 연차휴가로 대체했다는 통보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 통보라도 받으면 다행이고 나중에 퇴사할 때쯤 내게 연차휴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회사나라에서는 다치면 고쳐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나고 눈칫밥을 먹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등 죄목들이 붙기 때문에 그냥 참고 견뎌야만 한다. 일하다가 병들어거나 사고가 나서 죽는 사람도 정말 많지만, 아픈 걸 이야기하는 게 어렵다.(작년에만 2020명이 업무상 사고와 질병으로 죽었다.) 일할 때 유해 물질을 취급하는데 이 물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알기가 죽는 것보다 어렵다. 밖에서는 그렇게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회사나라만 들어오면 모두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인다. 동료가 관리자한테 괴롭힘을 당해도 못 본 척한다. 관리자에게 옳은 말 한마디 했다가 똑같은 꼴 당하기 마련이라 참아야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중공업 회사에서는 두발 단속을 했다.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잘라야 업무 효율이 높아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난 모 병원 구내식당 직원은 입사 첫날 팀원들 이름을 모두 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입소한 날 부대 지휘체계 관등성명을 밤늦게 외워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휴지 만드는 꽤 유명한 회사 대표가 자회사를 방문하면, 전 직원이 정문에서부터 도열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어느 화장품 회사에서는 사장이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직원이 수요일마다 사내 예배당에 들어와 기독교 예배를 드려야 한다. 타국인들에게는 온갖 예의를 갖추면서 회사나라 국민들에게만 함부로 대한다.

이처럼 직장 내 기본적인 인권조차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무슨 말이냐,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직장 내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늘리고, 다양한 의견을 펼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사내 인권침해, 직장 내 괴롭힘, 산업안전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루는 경로에는 노동조합 설립, 노사협의회 활성화, 고용노동부 근로 감독 및 진정,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노동·인권단체의 도움, 언론 제보 등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는’ 시절은 끝났다. 이전보다 덜 괴롭고, 더 다니고 싶은 절이 되도록 중들이 나서야 한다.

사실 중이 자주 떠나가는 기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손실이다. 회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개선을 시도하는 직원은 대부분 경력이 있고 유능한 직원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그렇게 아까운 사람들을 놓친다. 그러니 사업주들도 직장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좋겠다. 다양한 의견을 모을 수 있는 회사와 오로지 사장의 의견만 있는 회사 중에 어떤 회사가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생존력이 좋겠는가. 직원의 인권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와 인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회사 중 어느 쪽이 조직 효율성이 좋겠는가.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