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4년 전이었다. 이대로 세상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대뇌이던 때가 있었다. 2016년 11월 스산한 냉기가 버스 창을 굳게 만들고 있었고, 중부고속도로 상행선에는 정체가 심했다. 창 너머에는 거대한 트랙터들이 서울 톨게이트를 향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대열을 이룬 트랙터를 보니 인터넷 기사에서 읽었던 집회 일정이 떠올랐다. 실시간으로 올라온 기사에는 경찰이 농민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연행을 시작했다고 그랬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전남 해남과 경남 진주 등지에서 올라온 트랙터들이었다. 농번기에 바삐 모터를 돌렸을 트랙터들이 농로가 아닌 고속도로 4백 킬로미터를 달려와 밭 한 뙈기 찾기 힘든 서울 도심을 향한 건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은유이자 선언이었다. 극심한 정체 속에서 버스 안은 히터 바람이 승객들의 짜증 섞인 한숨과 섞이며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 답답함 속에서 ‘정지가 혁명의 시작’이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공고히 쌓아 올렸던 우리 사회의 한 끝자락이 빙하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내가 살고 있던 음성읍에도 읍사무소 앞 나무 밑에서 열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한 달 에 한 번씩 옹기종기 모여 촛불을 밝히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하며 마음과 뜻을 모았다. 얼마 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통과가 되었고, 이듬해 봄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인용했다.

대통령 탄핵 소식이 전해지고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동네 집회의 규모는 점차 작아지고 횟수는 뜸해졌다. 혁명적인 분위기는 빠르게 일상의 속도에 맞춰서 잠잠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아온 일상과 새로운 정권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의 비극과 2015년 11월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결국 운명을 달리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많은 시민들이 우울과 분노를 오가며 겪어냈던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그만큼 지쳐있었고 전환된 국면을 갈망했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광장에서 외쳤던 요구안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요구들을 간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노동기본권 보장, 재벌책임강화, TTP(관세철폐, 노동유연화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협정) 반대, 쌀 농산물 적정가격 보장, 빈곤퇴치, 장애등급제 및 부양의무제 폐지, 국정교과서 폐기, 차별금지법 제정, 남북관계 개선, 사드 배치 반대, 대학 구조조정 반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안전사회건설, 신규원전 건설 저지, 공공영역 민영화 중단, 공공의료 확충 등등. 잠시 열거해보면서도 이중에 꽤나 진척된 주제도 보이고, 그때 요구와 다르게 흘러간 주제도 보인다. 그리고 정체되어 있는 영역도.

기후위기와 전염병이 인간을 멈추게 만드는 요즘 시국에 나는 또다시 ‘멈춰버린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키운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24시간 365일 공장 돌리는 게 어려워진 사업주들의 곤란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장이 멈춰 서서 자신이 만드는 제품과 공정방식이 시민들에게, 사회에게, 자연환경에게 어떤 기여를 하고,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길을 달리던 온갖 자동차들이 멈춰 서서 온실가스를 줄이고 도보나 자전거로만 이동할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을 설계했으면 좋겠다.

장애인 시설을 모두 폐쇄시키고 장애인, 비장애인이 모두 어우러져 자립하기도, 연립(聯立, 잇대어 서다)하기도 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도시와 사회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휠체어를 타고 어디든 이동할 수 있으며 생산성을 따지지 않는 ‘권리로서 노동’에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도로와 폐기물 매립장 건설을 동반하는 맹목적인 산업단지 조성을 멈추고 자연과 공존하기 위한 여백을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코로나19는 역설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돌보고 공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방역지침에 따라 무한정 재생산되어 마치 시대정신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사회적 연결과 지지다. 특히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과 관련된 의제들은 흔히 보호 받아야 할 ‘약자’와 ‘권리’문제로 호명되지만 나는 그 의제들을 통해 기득권의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노인과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전보다 충분하게 연결되고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상상만 해봐도 우린 알 수 있다. 중증장애인이나 90세 노인이 만드는 사회는 경쟁적일까? 협력적일까? 냉정한 삶일까 사소하고 즐거운 삶일까? 살기 어려운 세상일까? 조금이라도 효율적이고 단순하고 쉬운 세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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