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넘어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어떻게 당신에게 안전한 사람이 될 것인가?"

"우주는 우호적인 공간인가?"라고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이른 아침 나에게 질문한다면, 내 표정은 적대적으로 변할 것 같다. 사실 저 의미심장한 질문은 아인슈타인이 던진 것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에 대해 죽는 날까지 탐구했던 그는 자연세계의 질서를 '물리학'의 언어로 규명하고자 했다. 추측컨대 적어도 그에게 우주는 우호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 유년부터 경험해야 했던 반유대주의와 세계대전, 잦은 이주 그리고 생활고가 그의 우주를 고달프게 만들었지만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는 인생을 전부 바쳐도 아깝지 않을 신비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신비로운 우주는 본의 아니게 나의 일상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그 우주를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와 다시금 질문을 한다면 이런 질문들이 되지 않을까. 매월 30만원을 요구하는 이 집은 내게 우호적인가? 어제 밤늦게 먹은 라면은 내 몸에 우호적인가? 좁은 인도와 갓길은 보행자에게 우호적인가? 점심식사 테이블에 같이 앉아 맛있게 잘도 먹는 저 직장 상사는 내게 우호적인가? 건물 한 면을 현수막으로 가리고 한껏 웃으며 내 경제를 책임지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저 국회의원 후보는 과연 내게 우호적인가?

2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나의 우주는 꽤나 우호적인 공간이었던 것 같다. '망해도 좋으니 기꺼이 도전해보리라'는 설익은 패기가 낳은 에피소드는 흑역사이면서 동시에 다시는 가져보지 못할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캠퍼스 근처 술집에서 무위의 수다를 떠나는 것이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가보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환상은 여행을 떠나는 상상들로 이어져 바깥으로 나돌았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새로운 전공을 찾고,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그만두었던 진로 변경은 당시로서는 과감한 선택이었다.(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었다.)

같은 세대를 구성했던 또래 친구들 중에는 '안전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밤마다 배드민턴을 치고, 대학교 정문 옆 등나무 아래서 고기를 구워 먹던 나와 다르게 그들은 주어진 학과 일정에 충실하고 대학원 진학을 거쳐 취업을 하거나 결혼을 했다. 그땐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 나라가 만든 경쟁 시스템의 레일을 더욱 진하게 칠하는 것 같아 재수 없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이불 밖은 위험해!'를 외치며 자발적 와상생활을 추구할 줄 몰랐다.

내가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던 배후들이 있어서였다. 여수시 화학공장에서 관리직이었던 친부는 한국 사회가 요구했던 사회성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근면하고 가정적인 직장인이었다. 90년대 경제호황기의 혜택을 우리 가족은 온 몸으로 받았다. 지난 칼럼에서 스스로 비판하던 산업단지 중심의 계획경제는 사실 나를 먹이고 키우던 삶의 조건들이었다. 친부가 승진할수록 사택 아파트의 동 이름도 F동에서 순차적으로 B동까지 올라갔다.(A동은 공장장의 사택이었다.) 그리고 친모가 성실하게 모은 돈으로 서울에 집을 샀다. "4인 가족 스탠다드(월급쟁이 아빠, 전업주부 엄마, 두 자녀)" 울타리 속에서 나는 안전하게 자라났다.

세계의 위험을 감지한 건 4인 가족 스탠다드에 균열이 생기면서였다. 네 블럭 중 첫 번째 블럭이 사라지자 우주는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남은 세 가족은 빈자리의 크기를 실감했다. 전업주부였던 친모는 동네 스타킹 공장에 취업했다가 손에 독이 올랐다. 안방에서 꺼이꺼이 우는 그녀를 무능한 장남은 같이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었다. 슬픔보단 배고픔이 날카로운지라 마냥 가만히들 있을 순 없었다. 주부생활만 20년 넘게 해온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가사도우미로, 차남은 전공을 살려 사진기로 용돈을 벌었다. 장남은 배관공, 일용직, 양계장 계란 줍기 등을 와상생활과 병행했다.

내가 안전감 속에서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캠퍼스 시절 남성 선배에게 들었던 '우리과 누구, 누구랑 자봤는데...'로 시작하는 경험담을 별다른 불쾌감 표현 없이 들었던 나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시절 여성 동기들이 안전하게 생활했을리 만무했고, 그 또한 경제적 여건에 따라 천지차이였다. 나중에 운이 좋아 여성인 상대와 긴 기간 연애하면서 내가 눈치 채지 못했던 불안의 역사를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우주는 우호적인 공간인가?"는 거대한 물리학의 질문처럼 보이지만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되뇌이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곳은 안전한 곳인가?", "이 관계는 안전한가?", "이 조직은 내게 안전한가?" 이를 기민하게 포착한 스웨덴 사민당은 'Secure people dare(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담할 수 있다)'라는 정치적 구호를 통해 충분한 사회보장제도의 실현을 외쳤다. 사회의 진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데 있지 않고, 서로에게 안전한 존재가 되고, 누구나 다른 의견을 내어놓아도 멸시 당하지 않고 공격 받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할 차례다. "나는 어떻게 당신에게 안전한 사람이 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안전한 조직을, 지역사회를 만들 것인가?"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