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내 삶을 헝클 긴 싫어! 난 빼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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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내 삶을 헝클 긴 싫어! 난 빼줘”
  • 김남균 기자
  • 승인 2021.01.31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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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내 삶을 헝클 긴 싫어! 난 빼줘”
진실 접근해가는 ‘북침설 교육’ 강성호 교사 국보법 재심재판
제자A씨 30년만에 친구에게 고백 문자…법정 증인은 불출석

[나는 빨갱이 교사입니다 ⑥] 끝내 나타나지 않은 제자…“그래도 난 원망하지 않는다”

1989년은 교사들에게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그 해 5월 28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됐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전후로 수많은 교사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전교조 결성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안 사건이 동원됐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에게 ‘빨갱이 교사’라는 낙인이 붙었습니다.

강성호 교사도 피해자입니다. 강 교사는 북침설을 가르친 교사가 되어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강 교사는 유죄입니다. 전교조도 여전히 법 밖의 노조입니다. 강성호 교사는 재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충북인뉴스>가 부임 두 달 만에 간첩으로 내몰렸던 강성호 교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듭니다. - 편집자 주

 

1989년 5월 강성호 교사가 재직하던 충북 제천 제원고등학교 운동장에 검은색 지프차가 나타났다. 강 교사를 지프에 올라태운 차안에 있던 남자들은 강교사를 ‘이놈’, ‘저놈’이라 불렀다.

제천경찰서 대공과 직원이라던 그들은 강 교사를 간첩이라 호칭했다. 저녁 뉴스시간에 자신이 간첩으로 보도됐다.

강성호 교사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조사실에서 제라를 만난 뒤에야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됐다.

대공과 형사 “저 선생님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지?” (1989년 5월)

형사는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서 답했다.

학생 :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평양이 우리보다 잘 산다는 얘기도… 하셨고요.”(1989년 5월 강성호 교사의 제자)

 

지난 해 1월 30일 강성호 교사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첫 심리가 청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판사 : “피고인은 단순 통일 교육에 불과할 뿐 이적 행위라 볼 수 없다는 취지로 항소한 거 맞으시죠? 불법 체포 감금이 어느 정도 인정된 거 같은데…. 증인 진술이 중요하겠네요. 누가 증인입니까?”

강성호 교사 변호인 : “그 당시 학생들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재심이 시작된 지 시간이 벌써 1년이 흘렀다. 재판은 막바지였다.

지난 1월 28일 청주지방법원 621호실 오후 4시 40분. 강성호 교사는 초초하게 제자들을 기다렸다. 제자들을 만난다면 32년 만의 재회다. 심장이 뛰었다.

지난 1월 28일 청주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수업시간 도중 북침설을 가르친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처벌을 받은 강성호 교사에 대한 재심 6차 심리가 열렸다.
지난 1월 28일 청주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수업시간 도중 북침설을 가르친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 처벌을 받은 강성호 교사에 대한 재심 6차 심리가 열렸다.

 

 

끝내 이뤄지지 않은 재회, 그러나 시작된 ‘진실의 대화’

 

2019년 12월 강성호 교사의 제자 A는 동창 B에게 카카오톡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보다 우리들의 삶은 덜 했겠지만 평생 마음의 멍에 짊어지고 살아왔고 다른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힘들어.”

 

A는 지난 1월 28일 증인으로 채택된 3명 중 하나다. 1989년 재판 당시 강성호 교사가 수업시간 중 북침설을 가르쳤다고 증언한 6명의 제자 중 하나다.

A는 고통스러워 했다. B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냥 난 이젠 조용히 살고 싶다. 건강도 잃어 몸과 맘도 피골이 상접하다. 그 당시 이유없이 불려가서 맘 졸이며 고생한 생각(을) 하면은 지금도 피가 거꾸로 올라와.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당하고 있던 내 자신에...”

 

A는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진실의 문을 여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두려워했다.

A는 “자식 위해 버티고 살고 있는 내 삶(을) 헝클 긴 싫다”라며 “난 빼줘! (강성호 교사의 일에) 더 관여 안할꺼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성호)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죄송하다는 말 조차도 꺼내기 죄스럽다. 얼굴 뵙고 싶지 않다. 살아가면서 더 벌 받고 살라 하면 그리 할께. 미안하다.”고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선생님은 그때 나 지금이나 너를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단다.“

 

지난 1월 28일 강성호 교사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증인, 아니 강성호 교사의 제자는 끝내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강성호 교사는 탄식했다.

“주심판사는 증인으로 소환한 3명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끝내) 증인들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32년 전인 1989년 5월 25일 새벽 1시경, 제천경찰서 대공과 조사실에서 대질신문으로 마주쳤던 그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판이 끝난 지난 1월 28일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글을 올렸다. 제자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들은 대로 이야기하는데 선생님은 그런 말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만 하십니까?"하고 나에게 대어 들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술했던 그들은 그 수업이 있던 날 결석한 사실이 출석부와 같은 반 학생들 증언으로 드러났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당시 검찰은 그런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고 법원은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후 저는 '북침설 교사'라는 멍에를 쓴 채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그 제자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과 저는 다 같이 군부독재정권이 만든 희생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아온 고통스런 세월만큼 그들 역시 힘든 삶을 이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강성호 교사는 제자에게 전하는 마지막 글을 이렇게 남겼다.

 

"○○아, 네 잘못이 아니란다. 선생님은 그때 나 지금이나 너를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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