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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는 빨갱이가 됐다 ③] 국보법 위반 누명을 쓴 어느 교사의 삶

강 씨의 수업 시위는 주요 일간지를 모두 장식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강 씨는 두 달 가까이 수업 시위를 이어갔다. © 조선일보
강 씨의 수업 시위는 주요 일간지를 모두 장식했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강 씨는 두 달 가까이 수업 시위를 이어갔다. © 조선일보

이른 아침이었다. 강성호 씨는 옷장에서 곱게 다려진 양복 한 벌을 꺼냈다. 군청색에 가로줄 무늬가 난 양복. 10년 전, 집안의 장남이 선생이 됐다며 좋아하던 부모님이 없는 살림에 큰돈을 들여 옷을 맞춰줬다. 분주한 공기에 어린 딸이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를 찾았다. 처음 보는 아빠의 정장 차림에 딸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빠! 어디 가요?”
“아빠도 학교로 출근해야지.”

강 씨는 웃으면서 현관문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강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 씨가 도착한 곳은 학교가 아닌 충청북도 교육청. 강 씨는 짐을 들고 교육청 현관으로 걸어갔다. 현관 계단에 피켓과 간이 칠판을 내려놓은 그는 낡은 서류 가방 안에서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흠, 흠... 35 페이지를 펴세요.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출근하던 교육청 공무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강 씨를 쳐다봤다. 강 씨는 수업을 이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경비원이 뛰어나와 강 씨의 양팔을 붙잡았다. 실랑이 끝에 강 씨는 쫓겨났다.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경비원의 눈을 피해 강 씨는 차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다가 다시 나오거나, 근처에 숨어 있다가 다시 교육청 현관 앞으로 돌아왔다.

‘나가라’, ‘못 나간다’는 소리가 종일 교육청을 흔들어댔다. 참다못한 강 씨가 왼손에는 기름통을, 오른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경비원을 향해 소리쳤다. 

“저는 지금 비폭력 시위를 하는 겁니다. 한 번만 더 끌어내려고 하면 확!”

라이터에 불이 켜지자 경비원은 뒷걸음질 쳤다. 교육청 현관을 차지한 강 씨는 텐트를 치고 본격적인 1인 시위에 돌입했다. 텐트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일어나 교과서를 펼치고 수업을 진행했다. 해가 저물면 동료 교사들이 찾아와 강 씨를 응원했다. 


모두가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강 씨는 일본어 교사였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교원 자격을 상실한 상태였다. 89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처음 교단 앞에 섰던 그는 학생들에게 북침설을 가르쳤다는 모함을 받아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전교조 결성 시기를 전후로 관련 활동을 했던 교사들에게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위반 누명을 씌웠다. 전교조 탄압이 목적이었다. 

“피고인은 초범이고 범죄 행위가 통일에 대한 지나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판사는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강 씨는 항소심 공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기쁘지 않았다. 강 씨는 이미 열 달을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았고, 교사 자격을 상실했다. 짐을 챙기러 감방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포댓자루와 그의 수인번호가 새겨진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도관은 강 씨가 처음 감옥에 들어올 때 입고 왔던 옷을 내줬다. 부모님이 맞춰준 양복이었다. 

청주교도소 철문을 열자 시린 바람이 강 씨의 양복 재킷을 뚫고 들어왔다. 여름 초입에 감옥에 갇혔다가 다음 해 한겨울에야 바깥세상으로 나온 강 씨는 교사로 불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양복을 입을 일이 없어졌다. 
 

강 씨는 노동운동 활동가로 변신했다. 충북 제천과 청주에서 전교조 상근 활동가로 일했다. 한 달 일해 버는 돈은 13만 원. 몸 하나 누울 곳도 구할 수 없었다. 전교조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낮에는 식비를 아끼려 생쌀을 씹어 먹으며 버티고, 밤에는 다른 교사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 강성호
강 씨는 노동운동 활동가로 변신했다. 충북 제천과 청주에서 전교조 상근 활동가로 일했다. 한 달 일해 버는 돈은 13만 원. 몸 하나 누울 곳도 구할 수 없었다. 전교조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낮에는 식비를 아끼려 생쌀을 씹어 먹으며 버티고, 밤에는 다른 교사들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 강성호

98년 여름, 김대중 정부는 전교조 합법화를 결정했다.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된 교사들은 하나둘씩 현장으로 복귀했다. 강 씨는 예외였다. 국보법 위반은 중죄였다. 복직은 계속 미뤄졌다. 참다못한 강 씨가 99년 새 학기가 시작되던 3월 1일부터 교육청 수업 시위에 나섰다. 강 씨가 ‘빨갱이’로 불린 지 10년째 되던 해였다. 


가족의 삶까지 삼켰다 

비정한 시간은 그 가족의 삶까지 삼켰다. 경남 진주에 있는 그의 고향 집에는 항상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부모님은 리어카 위에 옛날 과자를 수북하게 쌓아 중앙시장으로 출근했다. 과자를 만들고, 팔아 오 남매를 키워낸 부모님의 일상은 같았다. 충북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이 집을 헤집어 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작은 동네에 형사들이 다녀가자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과자 만드는 강 씨네 큰아들이 빨갱이랍니더.”
“허이고. 아들내미 교사 됐다고 윽수로 좋아하더만 결국 빨갱이 키울라고 그래 고생했는갑제.” 

고향 집에서는 더 이상 달콤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환갑의 부모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버스로 아홉 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피켓을 들고 시민단체, 국회,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 사이 강 씨의 막내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 한 장 없는 죽음. 아직도 가족들은 막내 동생의 죽음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린 동생이 감내하기엔 집안의 불행이 너무 컸다고 짐작할 뿐이다. 

  • ‘아들이 일어교사로 발령 받은 지 2개월 만에 북침설 조작으로 구속됐습니다. 막내아들은 충격으로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중략) 남파 간첩도 풀어 주는데 억울하게 빨갱이가 된 아들은 아직도 누명을 못 벗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늙고 병들고 하소연 할 힘도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소원은 제 자식이 교단에 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1999년 3월 5일 강성호 교사 부모 

집안에 유일하게 남은 막내아들이 강 씨를 대신해 부모님을 모셨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남동생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몇 년 뒤에야 서울에서 남동생의 소식이 들려왔다. 강 씨는 서울로 향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남동생과 마주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관련이 없는 남동생은 그 유가족들을 위해 만든 임시 거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와 수염, 푹 꺼진 눈, 거무죽죽한 혈색은 누가 봐도 ‘노숙인’이었다. 남동생을 보자마자 화부터 냈다. 

남동생을 고향 집으로 보내고 충북 제천으로 돌아간 강 씨는 어머니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진주 남강 강변에서 남동생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었다. 동생 옆에 떨어진 주민등록증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경찰서로 연락을 했고, 그렇게 가족들은 동생의 죽음을 알게 됐다. 강 씨는 동생의 유골을 뿌리면서 부모님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이미 죽은 애인데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세요.”

형제에게 좋았던 시간은 강 씨가 교사 발령을 받던 89년 봄이 마지막이었다. 강 씨는 "형이 교사가 됐으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학업을 마쳐라"며 동생을 다독였다. 가뜩이나 대화가 오가지 않던 형제 사이에 비극이 찾아오면서 둘은 완전히 멀어졌다. '뒤늦은 후회'는 강 씨를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동생이 왜 죽음을 택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강 씨는 매정했던 과거의 자신을 탓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줄 걸 정말 후회되죠.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원동력이 됐던 시기였는데. 남동생은 그러지 못했죠. 마음이 여렸어요. 그 가운데서 갈등을 삭히다가 우울증을 얻은 거 같아요. 나는 나대로 복직해보겠다고 여기저기 다니고, 부모님도 그렇고….” 

 

십년 동안 세 번 입은 양복 한 벌 

강성호 교사의 진실을 알리는 모임(강진모)도 결성했다. 99년 상반기에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충북 지역 전교조 관련 해직 교사 중에 복직이 안 된 사람은 도종환 씨(現,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강성호 씨밖에 없었다.  © 강성호
강성호 교사의 진실을 알리는 모임(강진모)도 결성했다. 99년 상반기에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충북 지역 전교조 관련 해직 교사 중에 복직이 안 된 사람은 도종환 씨(現,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강성호 씨밖에 없었다. © 강성호

“전화가 와뜨라. 니 교사 다시 시키준다꼬.” 

고향에서 걸려 온 전화를 끊고 강 씨는 옷장에서 그 양복을 다시 꺼냈다. 교사 발령 앞두고 부모님이 맞춰 준 양복은 10년 동안 고작 세 번의 봄을 맞았다. 교사 발령을 받았던 89년 봄, 교육청 수업 시위에 나섰던 98년 봄, 그리고 복직이 된 99년 봄까지. 

강 씨는 10년 전 집행유예로 출소했을 때처럼 기쁘지 않았다. 고작 이걸로 기뻐하기엔 지난 세월 강 씨가 잃은 게 너무 많았다. 강 씨는 충북 영동군 영동읍에 있는 영동농고(現.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로 발령받았다. 

“내 강 선생에게 부탁하고 싶은 아이들이 있어요. 당신이 참교육, 참교육하는 거 이런 아이들 돌보고 싶은 거 아닙니까?”

교장은 복도 끝에 위치한 창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불 꺼진 창고 안은 볕도 잘 들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찾아낸 건 어지럽게 널린 학교 비품과 종이상자로 만들어진 울타리였다. 울타리 안에는 열일곱, 열여덟 되는 아이 여섯 명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강 씨는 당황했지만 말을 이어 나갔다.
 

강 씨는 30대를 ‘빨갱이 교사’로 보냈다. 지금 강 씨는 충북 청주 상당고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최근에는 일본 캐리커처 작가와 함께 한일 평화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는 등 교사의 꿈을 펼치고 있다. © 강성호
강 씨는 30대를 ‘빨갱이 교사’로 보냈다. 지금 강 씨는 충북 청주 상당고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최근에는 일본 캐리커처 작가와 함께 한일 평화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하는 등 교사의 꿈을 펼치고 있다. © 강성호

“아... 안, 안녕. 여러분이랑 같이 지내게 된 강성호 선생님이야. 나는 영동이 좋아서 왔어. 잘 부탁해.”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강 씨를 올려다봤다. 특수학교에 갔어야 했지만 자리가 없어 농고를 오게 된 장애 학생들이었다. 강 씨는 일본어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이들 곁을 지켰다. 그 학생들과 강 씨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등하굣길에는 강 씨와 아이들의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강 씨는 자신의 트럭에 아이들을 태우고 집에 데리러 가고, 바래다줬다. 트럭 적재함에 올라탄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우리 강성호 선생님으로 삼행시 한 번 지어보자. 강!”
“강성호 선생님이….”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 웃었다. 강 씨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때때로 아이들은 트럭에서 내리지 않겠다면서 버텼다. 강 씨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하숙집으로 데려갔다. 아이들과 함께 대청마루 위에 누워 별을 세고, 텃밭을 가꾸면서 가슴 한 켠에 맺힌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 했다. 강 씨는 '빨갱이'에서 다시 '교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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