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학생운동 '전위대'맡아, 종교계 인사 보호막 역할

도내 전교조합법화투쟁 2명 구속 24명 해직, 도시산업선교회 노동운동 산실

민주화운동 뒷심된 지역어른
4ㆍ5공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지역 민주화운동의 싹을 틔운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소수의 대학생, 청년이 주축이 돼 실천운동을 벌였고 그들의 활동은 든든한 후견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재정권의 총칼에 의연히 맞설 수 있었던 후견인들은 주로 종교계 인사였다. 우선 육거리 제일교회의 이쾌재목사는 85년 대학 내에서 상영하지 못했던 광주진상을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등 교회 울타리안에서 민주화 기운을 충전시킬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교회에 내건 프래카드 가운데는 '주여, 이 썩은 정권을 당신의 채찍으로 심판하소서' 같은 엄청난(?)문구를 내걸기도 했다는 것. 이밖에 기독교계에서는 정진동(도시산업선교회) · 김정웅(명암교회) · 노영우(청주남교회)목사가 지역 재야 연대 기구의 대표, 임원을 맡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카톨릭에서는 신순근(꽃동네 회장) · 곽동철(사천동성당)신부가 수배자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소리소문 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 목사는 99년 월간 말지가 선정한 한국의 진보인사 100인 가운데 도내에서 유일하게 포함될 정도로 중앙 재야의 평가가 높은 주인공이다. 30년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왔고 아들 법영군이 지난 78년 약물복용으로 의문사를 당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민중을 이끈 대학 학생운동
80년대 청주지역 대학 민주화운동의 불길은 충북대에서 지펴졌다.
79년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으로 80년 민주화의 봄이 열렸고 학도호국단 체제였던 대학 학섕기구는 선출직 총학생회로 바뀌었다. 하지만 총학생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채 충북대, 청주대, 서원대의 운동권 소그룹을 중심으로 5월들어 시내 상당공원에서 최초의 3개대 연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역 학생운동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당지 활동가는 청주대의 김용명, 김병일 충북대의 김형근, 김재수, 김성구, 이승원, 민봉규, 정지성 등을 꼽을 수 있다. 5 · 18 광주 항쟁이후 대학은 5공 군사정권하에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81년 함석헌선생의 청주 강연장에서 충북대 김성구, 이승원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적은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됐고 3개대 연합가두시위를 준비하다 사전에 발각돼 6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82년 충북대 구자행이, 83년 에는 청주대 오동균이 강의실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됐다.
특히 김형근(제2건국 추진위), 김재수(민노총 충북본부), 김성구(충북우리밀)는 '충북대 3김씨'로 통한 동갑내기로 졸업후에도 사회변혁 운동의 중심에서 외길을 걸어왔다. 86년 4월 개헌 현판식 때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대거 청주로 내려와 청석예식장 사거리 일대에 3000명에 달하는 학생 · 시민집회가 열렸다.
당시 집회는 동료의 무등을 탄 채 김재수가 선도했고 청주에서 처음으로 화염병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때 자신감을 얻은 청주지역 대학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은 이듬해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대중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6 · 29 선언이후 대학 민주화운동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깃발아래 뭉쳤다.
청주대 백상진, 송재봉 충북대 유행렬, 염형철 등이 전대협 지역 '스타'로 꼽을 수 있다.

백상진, 송재봉은 91년 대표적인 조직 조작사건인 ’자주대오 사건'에 연루 돼 구속수감되는 고통을 당했고 유행렬은 89년 전국 최초로 전대협 탈퇴를 선언해 충격을 준 '쌍철용 사건'으로 총학생회가 탄핵되자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되기도 했다.

노동자 권익을 위한 노동운동
85년 대학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면서 노동운동의 토대가 마련됐다. 87년 6 · 29선언 이후 노동자대투쟁을 맞아 청주에서는 법인택시 노조의 파업투쟁이 벌어져 100여 명이 대량해고 되는 사태가 발섕하기도 했다.

도시산업선교회 정진동목사가 농성을 지원했고 89년 설립된 사창동 푸른교회 차윤재목사도 노동문제 상담소를 열고 AMK등 현장활동을 지원했다. 민노충충북본부 김재수사무처장은 충북대 졸업직후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지역 민주노동운동의 산증인됐다.

전교조 활동으로 귀결되는 교육민주화운동의 경우에는 80년대초 공주사대 학원자주화투쟁의 주역이었던 권영국이 시국사건으로 교사발령을 받지 못하고 충북대에 학습소모임에 참여한다.
'접시꽃 당신'의 시인이자 교사인 도종환과 고흥수는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하며 교육현안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에 나섰다.

비교적 조직틀을 갖춘 흥사단 청주지부 교사분회에서는 김병우, 황연길등이 활동했다.
87년 7 월 6 · 29직후 유화국면으로 보안심사에 걸려 발령을 받지 못했던 권영국이 충주로 부임하고 옥천 동이중에 근무 하던 도종환도 청주로 특별전보됐다.

교육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교사들은 청주YMCA를 거점으로 회합을 거듭했고 마침내 같은 해 11월 신탄진 근교 '기독교 매포수양관'에서 민주교육추진 충북교사협의회(충북교협)를 창립했다. 초대회장은 고흥수가 부회장에는 황연길, 김미영이 추대됐다. 충북교협은 89년부터 노조준비체제에 돌입했고 공안당국은 이데올로기 공세로 저지에 나섰다.

같은해 3월 제천 제원고에 근무하던 강성호를 '북침설 교사'로 몰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고 충주 임종헌은 불온서적 소지혐의로 국보법 올가미를 씌웠다. 6월 10일 전교조 충북지부 창립과 함께 초대 권영국 지부장이 구속되고 김병태 제천지회장, 김광택 충주지회장, 김수열 단양지회장, 정태옥 괴산지회장 등이 직위해제 당했다. 김수열지회장이 재직했던 단양 매포에서는 그의 직위해제에 항의한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며 운동장에서 농성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부장 권한대행을 맡은 도종환도 청주교육장의 고발로 연이어 구속됐고 유병귀 노조건설 특위장은 해임처분을 받았다. 전교조합법화를 위해 종교계 · 학계의 연대활동이 두드러졌고 특히 민주화교수협의회(민교협) 소속 85명의 도내 대학교수들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각 대학 지회장은 김정기(서원대) 윤구병(충북대) 양병기(청주대) 등이었다.
마침내 99년 1월 '교원의 노동조합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이 국회를 통과해 노조합법화를 이루어냈다.
오황균지부장은 1월 20일 청주 CCC회관에서 '전교조 합법화 축하와 감사의 자리'를 마련하고 68명의 지역 사회단체 실무자에게 감사장과 감사휘호를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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