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 빨갱이 교사가 보낸 10년…국가보안법이 모든 걸 망쳤다
- 제자가 스승을 ‘빨갱이’라 지목했다
- 교사에서 간첩으로, 뒤집혀버린 인생
- [팩력배들] 초임 교사가 ‘빨갱이’가 된 사연은?
- 선생님이 간첩이 됐다니…30년만에 이어진 스승과 제자
- 국가보안법 제정 72년…충북에서도 폐지 요구
-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내 삶을 헝클 긴 싫어! 난 빼줘”
- 강성호 교사와 함께하는 ‘위로와 연대의 시간’
- “저는 빨갱이 교사가 아니라 군부독재의 희생양입니다”
- 빨갱이교사 조작사건…강성호교사도 충북인뉴스도 옳았다
- ‘국가보안법의 굴레’…32년 만에 마침내 벗었다
- 유은혜 장관, ‘북침설교육 조작사건’ 피해 강성호 교사에 사과
[나는 빨갱이 교사입니다 ⓸] 간첩으로 몰렸던 교사의 재심 신청
강성호 선생이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위반으로 잡혀가자 학교에는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잡혀간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였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교무회의 시간이었다. 선생들은 일제히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교무실 창문을 향해 교장과 대화하고 싶다고 소리쳤다. 교장은 운동장으로 나가 허공에 삿대질을 해댔다. 교장과 학생들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교장 선생님이 수업 중에 교과 내용 외의 말을 하는 선생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전에 실장이랑 부실장을 교장실로 불러서 얘기하셨잖아요!”
“내가,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했어? 그런 말 들은 사람 있으면 나와!”
각 반의 실장과 부실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보다 못한 선생들이 아이들의 팔을 붙잡고, 등을 떠밀었다. 교실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300명의 학생이 강 씨가 무죄라는 탄원서를 썼다. 학생들은 강 씨가 수업 시간에 북한 모습을 보여준 건 맞지만 독재 정권을 찬양하거나 북침설을 가르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강 씨가 ‘빨갱이’라고 말하는 학생은 전교생 중 단 여섯 명이었다. 두 명은 학교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 학생들의 진술을 토대로 교장은 강 씨를 고발했다. 89년 5월에 체포된 강 씨는 감옥에서 8개월을 보냈다. 출소한 뒤 교사 자격을 상실했다. 강 씨는 10년 동안 ‘학교 밖 교사’로 살았다.
- 1989년 5월 24일, 서울 인덕공고 조△△ 교사 (북침설, 북괴찬양)
- 1989년 5월 26일, 경북 동산여중 이△△ 교사 (북괴찬양)
- 1989년 5월 27일, 충북 제원고 강성호 교사 (북괴찬양, 북침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1989년 5월 28일)을 전후로 전국에서 빨갱이 교사가 줄줄이 등장했다. 모두 터무니없는 사건이었다. 한 여학생이 ‘김일성을 만나보고 싶다’고 쓴 낙서를 방치했다고 교사가 잡혀가거나, 1년 전 술자리에서 북침설을 말했다는 누명을 씌우면서 체포해갔다. 89년 정기국회에서 이철 의원(무소속)은 전교조 탄압을 위해 정부 기관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만들어진 간첩, “나였을 수도 있다”
강성호 선생의 동료인 김성장 씨는 자신이 붙잡혀 갔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강 씨가 붙잡혀 가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김 씨는 강성호 선생과 교장실로 불려 갔다. 교장실에는 육성회 임원과 학교 관리자들이 소파에 앉아 그들을 노려봤다. 육성회장이 김 씨를 향해 쏘아붙였다.
“왜 수업 중에 공부나 가르칠 것이지.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그래요? 한문 수업에 ‘우’(愚,어리석을 우)자를 가르치면서 대통령 이름은 왜 언급합니까?”
“별 뜻 없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화였다.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 씨였다. 노 씨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태룡(太龍)이란 이름을 지어주려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노 씨가 불이익을 얻을까 우려돼 ‘어리석을 우’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김 씨는 학부모로부터 그런 지적을 받는다는 게 우스웠다.
강성호 선생이 잡혀가고 김 씨는 구명운동을 벌였다. 고작 열흘이었다. 김 씨는 영동군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처음엔 못 가겠다고 버텼다. 이유도 모른 채 학교를 떠날 수 없었다. 교육청 장학사가 김 씨 아버지와 학창시절 스승을 데리고 하숙집을 찾았다. 결국 김 씨는 제천을 떠나야 했다.
“제가 강성호 선생님 일과 관련해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채의식이 계속 있었죠. 나를 칠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어요. 나를 쳤을 때랑 강성호 선생을 쳤을 때 누가 부담이 덜할까요? 저는 충북 사람이잖아요.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랐고, 충북대 선후배나 주변 인물들이 많았어요. 나를 둘러싼 인맥 이런 걸 무시하긴 어려웠겠죠.”
김 씨는 자신이 잡혀가지 않은 이유가 ‘연고’에 있다고 봤다. 김 씨는 ‘충청도 토박이’였다. 강 씨는 경남 진주가 고향이고 그곳에서 학교를 나왔다. 그 기억은 김 씨에게 빚으로 남았다.
많은 걸 바꿔 놓았다
골목길에는 초인종 소리만 울렸다. 교장은 “저 강성호입니다” 한 마디에 벌컥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강 씨는 대문 앞에 서서 계속 기다렸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장은 강 씨에게 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선생님, 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절 왜 고발하신 겁니까.”
“내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야. 경찰에서 투서가 날아왔고, 교육청이랑도 논의를 했었네. 내가 지은 죄가 많은가 봐. 노후에 이렇게 지내고 있네.”
교장의 어깨 너머로 시선이 향했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인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교장의 아내였다. 교장은 강 씨가 구속되던 해 퇴직하고, 아픈 아내를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강 씨는 더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가끔 강 씨는 자신을 ‘빨갱이 교사’라고 고발한 여섯 명의 학생이 생각났다. 동료교사들에게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선생님을 교단에서 내몰았다는 죄책감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데요. 해마다 5월이면 경찰에 끌려가던 모습이 생각났다고 하네요. 만나 뵙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애들이 연락하기 두렵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강 씨는 편지를 썼다. 편지의 끝맺음은 모두 같았다.
‘나에겐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에게. 불행했던 시대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픈 말은 단 하나. 나는 너에게 영원한 스승으로 남고 싶다.’
그 편지를 받은 학생 모두에게서 답을 받진 못했다. 일부 학생과 몇 차례 통화가 오갔지만 재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들춰내기 싫은 기억이라고 연락을 거부한 학생도 있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강 씨는 그들이 대공과로 끌려 와 진술을 강요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30년의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교장은 죽었고, 학생들은 부모가 됐다. 강 씨를 수사했던 형사는 정년퇴임을 했다. 취재 과정에서 담당 형사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전화를 걸었지만 이제 여든이 넘은 형사는 귀가 잘 안 들린다고 말했다. 목소리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이.그.사.건.담.당.형.사.였.어.요.”
“하도 오래돼서 다 잊어 버렸지 뭐…. 내가 그 사건 담당했었다고? 대공과에서 다 달려 들어서 한 거지. 그게 나 혼자 한 건가….”
기억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르게 자리 잡았다. 누군가에겐 부채의식으로, 누군가에겐 일상으로, 누군가에겐 악몽으로…. 그리고 강 씨에겐 꼭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됐다. 강 씨는 올해 5월 27일 청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언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강 씨는 말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빨갱이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