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홍범도’ 함께봐요 연속기고…김정호 충북역사교사모임 회장(한국교원대 부설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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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충북역사교사모임 회장.
김정호 충북역사교사모임 회장.

봉오골이라 불렀던 봉오동 지역은 한반도 두만강변에서 수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최진동 삼형제가 청나라 지방관청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개척했던 봉오동은 세 개의 마을인 상촌, 중촌, 하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국인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던 이 골짜기는 어느새 한인 마을이 되었고 최진동을 중심으로 소규모 의병, 독립군들의 활동 기반이자 이주민들의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서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와 국민회군, 신민단 등의 연합부대가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였다. 최진동이 이끌었고 25년간 게릴라 전투에서 활약했던 홍범도가 전술과 전략을 담당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일제강점기 위축되었던 조선의 독립운동에 첫 승리를 안겨준 사건이었고,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홍범도는 청산리로 이동하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 장군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평안도 평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포수로 이름을 날리며 항일의병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의병 토벌과 탄압이 심해지자 러시아 연해주의 권업회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에는 일본의 간도토벌로 일본군 공세에 밀려 1921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자유시참변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에 의해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여단에 소속되었다. 1922년 말에 고려혁명군에서 제대하여 제대군인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에서 협동농장을 이끌었고, 1927년 10월에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1937년까지 연해주의 협동조합에서 일하다,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이후 소도시 크즐오르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역사교육에서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 개인의 행위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인물이 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물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배경 속에서 역사적 인물이 어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역사적 행위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분석해야만 역사적 인물의 행위동기를 깊이 공감할 수 있다.

홍범도 장군의 행위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홍범도 장군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탄압 정책을 살펴보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주어진 극한의 환경을 이해해야 하며, 여러 독립운동 방략 중에서 홍범도 장군은 어떤 고민 끝에 무장투쟁에 참여하였고 자유시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봐야 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인물은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 없으며 함부로 인물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다.

지난 8월 31일 육군사관학교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교정 외부 이전하는 것을 확정하였다. 그의 소련 공산당 활동이 육사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홍범도라는 역사적 인물을 맥락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접했던 사회주의가 어떤 의미인지 제국주의와 싸워야 했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고 있다면 홍범도 장군의 자유시 이동과 소련공산당 입당이 독립운동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충북 제천의 의암 유인석은 성리학을 공부하다 항일의병이라는 무장투쟁활동을 선택하였다. 충북 진천의 보재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기 고종 황제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었으나 이후 연해주에서 권업회를 창설하고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여 왕정이 아닌 새로운 정치체제를 고민하였다. 충북 청주의 단재 신채호는 성리학을 공부하다 공화정체를 지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공부하며 조선의 독립을 꿈꿨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사상과 방략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들 모두가 바라보았던 곳은 조선의 독립이었으며 이들은 새로운 나라를 위해 애썼을 뿐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쉼 없이 새로운 방법과 전략을 고민했고 찾아다녔다. 어떤 학문이든 공부하고 토론하며 미래를 만들어갔다.

홍범도 장군도 먼 타국인 카자흐스탄에서 서거하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했으며 광복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독립운동가였다.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8월 18일 국립 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봉환은 1994년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되었고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던 2020년에 한·카자흐스탄 양국이 유해 봉환을 약속했지만 코로나19로 결국 미뤄졌다. 그리고 2021년에 어렵게, 정말 힘들게 한국으로 유해를 봉환할 수 있었다. 2021년 8월 유해 봉관 즈음에는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하지만 지금 정부는 홍범도 지우기에 혈안이다. 5년 전 국방부의 홍범도 관련 영상은 어느새 비공개처리 되었고,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은 철거가 확정되었으며, 최근 강원지역 일선 학교에는 홍범도 관련 동상과 벽화의 설치 현황을 조사하는 공문이 발송되었다가 논란이 일었다. 홍범도 지우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렵다.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지워질까 걱정이 한가득이다. 먼 타국에서 어렵게 모셔온 홍범도 장군을 이제는 그만 쉬게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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