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홍범도’ 함께봐요 연속기고…김승환(충북대 명예교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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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로 시작하는 <독립군가> 4절은 이렇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 악독한 원수 무리 쓸어 몰아라 / 잃었던 조국 강산 회복하는 날 / 만세를 불러보세”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독립군의 기상이 담긴 거룩한 노래다.

이 노래처럼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던 장군이 있었다.

구척장신의 형형한 눈빛으로 왜군을 섬멸하던 그의 이름은 홍범도(洪範圖, 1868~1943), 민족의 영웅이다.

평양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7일 후 모친을 잃고, 9년 후 부친을 잃은 그는 불우한 소년이었다.

한때는 대한제국의 군인, 가난한 농부, 공장 노동자였고, 한때는 설악산 승려였던 홍범도는 어느 날 총을 들었다.

홍범도가 총을 들어 사냥 포수가 된 그날, 그의 민족해방투쟁도 시작되었다.

신채호 선생이 <조선혁명선언>에서 천명한 반제항일 무장투쟁을 실천한 그는 지금도 민족의 영혼으로 삼천리강산에 떠도는 홍장군 범도다.

1907년, 일제의 통감부와 대한제국이 의병의 봉기를 봉쇄하고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자, 홍범도는 포수들을 모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고 일본 군경과 유격전을 벌였다.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호랑이처럼 전투하던 그의 부대를 칭송하여 함경도 민중들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홍대장 홍범도 그는 비호처럼 날아 조선, 간도,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1907년 그의 아내 단양 이씨는 남편을 회유하라는 일제에 항거하던 중 고문 끝에 옥사했고, 아들 홍양순은 1908년 정평배기 전투에서 죽었다.

홍장군은 아내와 아들을 민족해방투쟁의 제단에 바친 한을 품고 살아야 했던 대장부였다.

그러나 의병 장군 홍범도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길, 반제 항일무장 투쟁이 그의 신념이었고 민족해방만이 그의 목적이었다.

홍대장은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선포되자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삼일운동 직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이 되어 만포진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이듬해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민족해방투쟁에 길이 빛날 승리를 거두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은 홍범도 부대가 157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김좌진 장군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고,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4백여 명을 사살했다.

이에 대하여 적의 기록인 조선총독부의 「간도 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1921)에는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어서 부하들로부터 신과 같은 숭배를 받는 것으로 기록했다.

일본제국주의는 봉오동, 청산리 패배에 대한 복수로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일으켜 수천 명의 조선인을 살해했다.

이어 대규모 부대로 독립군을 압박하자, 홍범도 부대를 포함한 독립군 부대들은 1921년 러시아의 자유시 알렉세예프스크(Alekseyevsk)로 이동했다.

이해 6월, 고려혁명군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독립군 수십 명이 죽는 자유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홍장군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없고, 자유시 사건 소식을 듣고 땅을 치고 슬퍼했다는 사실만 전한다.

연해주에서 콜호스를 운영하던 홍범도와 조선인들은 스탈린의 민족 탄압 정책으로 1937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로 이주당한다.

그곳에서 홍장군 범도는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지도자였다.

홍범도 장군은 민족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달래면서 고려인 까레츠키들과 아리랑을 불렀고, 말년에는 [고려극장] 관리인으로 평등의 삶을 살았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Қызылорда)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묘비문은 이렇다.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홍장군의 유해를 송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셨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 몇 가지 비판이 제기되어 있다.

그것은 1921년 자유시 사건 당시의 태도, 1922년 코민테른에 식민지 조선 대표로 참석, 1927년 러시아 공산당 가입,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의 의미, 그리고 확인되지 않는 무장투쟁의 사료 등이다.

하지만 민족은 해석공동체이자 기억공동체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를 택했던 것은 공산주의가 제국주의를 부정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민족해방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날아라 홍범도 민족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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