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혐오에 구역질하는 나...그러나 나 또한 '적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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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뉴스와 신문을 본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족집게로 하나씩 끄집어내면 간신히 찾아낼 수 있는 주제가 있다. '선거', 그렇다. 바야흐로 총선 선거 기간인 것이다. 때아닌 역병으로 제대로 된 총선 대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없는 시민단체에게 그나마 인터넷과 SNS는 숨통을 터준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보도자료와 카드뉴스를 보길 바라는 활동가들의 손길이 절박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정당 내 경선, 비례대표 한 석을 위해 '짱구'를 돌리는 정당 간 치열한 싸움, 어김없이 늦춰지는 선거구 획정 등. 돌아가는 선거판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선명하다. 중학생 시절 교과서 속에 숨겨놓고 심취해서 읽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오크들의 피떡. 닦아낼 여유 따윈 없이 다시 전쟁터로 나가서 굳은 피떡 위에 또다시 피를 흘리는 것. 목숨을 걸고 오직 돌진만 하는 모습.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는 것. 정치를 혐오하지 말자고, 내가 사는 세상을 직면하자고 활동가가 되었지만, 이 꼴은 아직도 적응이 안 돼 떠오르는 혐오를 감출 수 없다.

한 번은 직장 상사가 나보고 한 번 출마해보란다. 너무나 궁금하단다. 이상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건지, 정치를 하면 이상해지는 건지 모르겠으니, 나더러 직접 해보라는 거다. 내 일상을 돌아보면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후자'로 단언할 테다. 내가 어찌 그 '피떡 오크'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주변의 작은 부당함을 해결하지 않고 어찌 사회의 부당함을 논하겠냐며, 정의감에 불타 돌진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아군들을 모질게 칼질하고 있으니 말이다. 힘을 휘두른다는 건 사람이 이상해지는 길인 것 같다.

조금 더 시야를 작고 좁게 해보자. 뉴스에서나 볼 것 같은 '레알 권력자'들의 권력 말고,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가장 많이 마주하는 권력. 가장 많이 느끼는 건 나이 권력이다. 친애하는 덤블도어 교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이가 늙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어겠냐고."

하지만 내가 사는 이곳은 영국 호그와트 마법학교가 아니라 2020년의 대한민국이다. 여전히 초면의 상대에게 하는 첫 질문이 "몇 살이냐"인 곳. 이곳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중년 세대는 이삼십 년 뒤 자식세대들의 청춘을 이자 삼아 거품 경제의 호황을 즐긴 경험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다. 겨우 한자리 숫자의 경쟁률로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던 청년 시절을 거쳤다. 이들은 거대해진 재벌 대기업의 임원이 되어, 대학생들에게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고 지껄일 권리를 지녔다고 착각한다.

또 다른 일상의 권력은 남성이 가진 권력이다. 경실련에서 발표한 '국회의원 당선, 아빠 찬스 통하더라'는 보도자료를 홍보하다가, 문득 왜 '엄마 찬스'는 없는지를 깨닫고 키보드를 쿵쿵 쳤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에게 미적, 가사적 노동을 자연스럽게 요구받으며 "비혼 여성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는 은은한 권력질을 당하는 일상을 간신히 버틴다. 그리고 나면, "호기심에 N번방에 들어가 눈팅만 했는데 처벌받나요"라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자의 네이버 지식IN의 질문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남성들을 또 다시 견뎌야 한다.

정체 모를 지위에 따른 권력도 있다. 오늘도 나는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생뚱맞은 화풀이를 하는 이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답변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그 자의 화풀이 대상으로 내어준다. 그 순간 나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 훼손되고 너덜너덜해진다. 이를 '감정노동'이라 칭하던가. 학교라는 공권력을 업고 학생의 인권을 유린하던 선생님들을 권력질의 첫 만남으로 시작한 나에겐 일상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권력을 휘두르는 '레알 권력자'들이나 혐오스러운 대상인 것은 매한가지다.

한편 권력에 대한 화가 늘수록 나에 대한 검열은 더욱 가혹해진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다 보니 내게 나타나는 증상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자를 향한 폭력적 언사이며, 또 하나는 비권력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용서다. 둘 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중적이고도 모순된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경멸하고 있으면, 성경과 경전은 나에게 사랑과 자비를 통해 해결하라고 문을 열어준다. 하지만 나는 그저 범인(凡人)일 뿐인지라 열린 문을 앞에 두고 멍때리며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칼럼계의 아이돌 김영민 교수는 그의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에서 "혹자의 삶이 지나치게 고생스럽다면 누군가 설거지를 안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는 "적폐가 되도록 설거지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각 세대는 자신의 설거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세대 간의 정의(justice)"라고 했다. 

어르신들이 내가 어리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을 때, 나를 대변하지 않은 대가로 경제 정의는 무너졌다. 그 결과 청년 세대에게 정의(justice)란 남일이 되어버렸고, 탯줄은 길고 가늘어져 독립의 길은 멀어졌다. 현세대가 에너지와 재화를 아끼지 않고 사용한 결과, 다음 세대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핵폐기물을 안고 살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는 자신의 숙명에 목소리 낼 기회조차 없다. 휠체어가 내 옆에 다니지 않는 건 휠체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장애인 본인 말고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다. 나는 지금 권력자로서 무얼하고 있는가. 노력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권력으로, 설거지를 내팽개치고 침묵하는 나는 또 다른 적폐이다.

싸움이란 찻잔 속 태풍이라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본질을 볼 수 없다지만. (역시 마찬가지겠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권력이 '적폐'일 것이라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쟁취하지 않고 가진 것을 휘두르는 것은 죄악이다. 권력자인 자신을 향한 혐오에 대해 근본을 반드시 고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죽는 순간까지 추악한 피떡 투성이 오크가 되어버린다. 

묻는다. 권력이란 무어냐고. 누가 누구에게 주었냐고. 내 스스로 권력을 위임하지 않은 자의 권력에 왜 내가 휘둘려야 하느냐고. 사회 안에서 내가 가장 약자인 것만 같은 억울함과 뭣도 하지 않는 죄책감이 쌓여, 어느새 또다시 나는 권력에 대한 혐오에 구역질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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