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위한 충청권 논의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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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남성이 기름통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열차가 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라이터에 불이 켜졌다. 불과 몇 초 사이 불길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지하철 객차 12개가 불탔고, 192명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사람들은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역사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참사가 벌어지고, 유가족들은 직접 나서서 해외 사례를 모았다. 그렇게 1년 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만들어졌다. 참사 뒤에는 ‘기업’이 있었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그리고 세월호 침몰에 이르기까지 생때 같은 숨이 끊어졌다. 

모든 건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의 통곡에서 시작됐다. 2017년 故노회찬 정의당 국회의원은 한국판 ‘기업살인법’을 내놨다. 사업장 또는 다중 이용 시설에서 사람이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사업주·법인·경영책임자·공무원 등 사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안이다. 

  • ‘오늘날 대부분의 대형재해 사건은 특정한 노동자 개인의 위법행위 결과가 아니라 기업 내 위험관리시스템의 부재, 안전불감, 조직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 이 같은 ’현대형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업 등이 조직적·제도적으로 철저한 안전관리를 하도록 유도하는 입법이 필요함.’ -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이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노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기업에 의해 벌어졌던 수많은 참사를 ‘현대형 중대재해’라 명명하고, 책임 소재를 따지겠다고 밝혔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이 법안은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노회찬(왼쪽) 정의당 원내대표가 민주노총 등과 함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노회찬(왼쪽) 정의당 원내대표가 민주노총 등과 함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뉴시스

책임질 사람이 없다 

민주노총 충청권 본부는 21일(화)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발제를 맡은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이전에는 주로 피해자 단체가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입법에 앞장섰다면 올해는 민주노총이 문제를 제기해보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최근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차이를 짚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면서 기업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졌고,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었다. 

김혜진 상임활동가는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이 사망했던 사례를 들었다. 당시 검찰은 ‘위험의 외주화’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외주화 관리 체계가 복잡해질수록 책임 소재를 묻기가 어렵다. 서울메트로가 구의역을 맡고 있지만, 스크린도어 유지관리 협력업체는 ‘은성PSD’였다. 본래 2인 1조 근무가 원칙이지만, 사측은 작업확인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현장에 한 사람의 노동자만 내보냈다. 

21일(화) 민주노총 충북본부에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모색을 위한 충청권 토론회가 열렸다. ⓒ 김다솜 기자
21일(화) 민주노총 충북본부에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 제정 모색을 위한 충청권 토론회가 열렸다. ⓒ 김다솜 기자

안전관리자가 있으나 작업 인원이 부족하고, 업무 부담이 과중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업무 관리는 불가능했다. 사고 발생 시 안전관리자는 외출하고 자리를 비웠다. 작업현장 실태 점검, 안전 교육, 안전장비 착용 상태 점검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었다. 스크린도어 마스터 키를 관리하던 구의역 역무실 직원들도 작업 내용이나 안전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김 상임활동가는 “산업안전보건법은 구체적인 행위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처벌할 수 있으며, 지금처럼 안전관리를 소홀하게 하는 조직문화를 반영하게 어렵다”며 “외주화되고 관리체계가 복잡해질수록 책임은 멀어지기 마련이기에, 이런 조직문화에서도 기업과 최고경영책임자까지 처벌받게 하려면 독자적인 법안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도 ‘위험’하다 

참사는 가까이 있다. 최근 5년 동안 충북 지역에서 발생한 가스누출 사고는 30여 건. 3명이 죽고, 18명이 다쳤다. 무미건조한 숫자로 명시된 이 죽음들이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충남 서산시 롯데케미칼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공정 과정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친 사람만 해도 인근 주민과 직원을 합쳐 60여 명에 이르렀다. 

청주 오창 소재 더블유스코프코리아에서 지난해 12월, 노동자 한 명이 누출 사고로 사망했다. 사업장에서 터지는 누출 사고는 지역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에도 큰 지장을 준다. ⓒ 김다솜 기자
청주 오창 소재 더블유스코프코리아에서 지난해 12월, 노동자 한 명이 누출 사고로 사망했다. 사업장에서 터지는 누출 사고는 지역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에도 큰 지장을 준다. ⓒ 김다솜 기자

최진일 충남노동건강인권센터 새움터 대표는 “지금은 중대재해라고 부르지만, 처음에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근거로 한 사업장에 부상자가 10명이 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중대재해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도 요구했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중대재해 범주를 넓힐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기업에서 발생한 재해는 ‘노동자’만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좁게는 그 공장이겠지만, 넓게는 지역 사회와 우리나라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다 노동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친 사례는 롯데케미칼 공장 폭발사고 말고도 많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책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노동자와 시민 죽음 모두에 책임 △기업의 최고책임자·원청책임자 처벌 △기업 자체를 처벌 △공무원의 관리·감독 책임 △징벌적 손해배상의 내용이 담겼다.

‘입법’만이 답은 아니다 

토론자들은 중대재해 기업을 처벌하는 일이 입법에만 그쳐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노동계와 시민이 손을 잡아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 김다솜 기자
토론자들은 중대재해 기업을 처벌하는 일이 입법에만 그쳐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노동계와 시민이 손을 잡아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 김다솜 기자

법안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독소조항을 만들어 법망을 피해가려는 시도는 어떻게 하며, 실제 우리 일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또 국회의원들이 노동자와 시민을 대변해줄 수 있는 걸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물음표는 여전히 많다. 

“법이 만들어져도 법망을 피해가려는 시도가 있을 겁니다. 외국에서 (기업살인법으로) 처벌받은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이에요.

그래도 (이 법안을) 만들려고 하는 건 노동자와 시민의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어서입니다. 기업이 이윤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로만 인식하지, 범죄라 생각하지 않아요.”

-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이 제정된 건 2008년이다. 사업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를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하고, 처벌받을 수 있는 규정이다. 영국 연간 재해 사망자수는 10만 명 당 0.6명. 우리나라는 9배 이상 높다. 그런데 10년 동안 기업살인법으로 처벌받은 사고는 26건에 불과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입법에 성공하더라도 그 전망은 밝지 않다.

김연희 대전충남보건의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을 비판했다. 김용균 씨가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사건이 있고 나서, 28년 만에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지만 모든 것이 ‘해소’되진 않았다. 위험의 외주화는 허용되고, 작업중지권은 오히려 축소됐다. 그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법은 있어도 처벌할 수 없는 독소조항이 생길 것”이라며 “노동안전과 시민운동이 연계해서 풀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종현 민주노총 충북본부 본부장은 코로나19 사태가 노동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조 본부장은 "코로나19로 온 사회가 위축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꺼내지도 못한 채 가라 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김다솜 기자
조종현 민주노총 충북본부 본부장은 코로나19 사태가 노동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조 본부장은 "코로나19로 온 사회가 위축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꺼내지도 못한 채 가라 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김다솜 기자

‘교육’에 방점을 찍은 의견도 나왔다. 조종현 민주노총 충북본부 본부장은 대한민국이 가진 친기업 정서를 문제 삼았다. 모든 학생들이 기업을 가장 중요한 경제 주체라 배우면서 성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대전에서 희생된 노동자 아버지 한 명이 청주 어느 학교의 교감선생님이셨어요. 누구보다도 노동조합을 싫어하셨던 분이에요.

그러다 자신의 아들이 산재 사고로 사망하니까 전교조 선생님을 가장 먼저 찾았어요. 본인이 불행의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 대부분의 학생은 우리 사회 중요한 주체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걸 깨는 게 필요해요.”

-조종현 민주노총 충북본부 본부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가 폭넓게 국민에게 가닿으려면 ‘교육’이 중요하다. 김 본부장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고 가장 먼저 탈핵 선언을 한 나라가 독일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우리나라 전교조에 해당하는 독일 교원 노조가 체르노빌 사건 30년 전부터 탈핵 교육을 시켰다”며 “그 학생들이 자라서 사회 곳곳에서 탈핵 운동에 앞장서는 동량으로 컸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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