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세계 기후정의 운동의 등장과 변화’를 듣고

묶음기사

충북기후정의강좌가 5월 2일부터 7월 11일까지 10차례 진행됩니다. 이 강좌는 다사리학교가 주관하고 충북기후위기비상행동이 지원하는 행사입니다.

본보는 앞으로 10차례에 걸쳐 기후정의강좌에 대한 내용을 참여자들의 기고를 받아 전할 예정입니다.(편집자주)

 

글 : 조상민 (청주 탈핵신문 읽기모임)

작년 여름에 트위터에서 영상 하나를 보았다. 파키스탄에 어마어마한 홍수가 발생해 건물들이 통째로 무너져 급류에 휩쓸려가는 영상이었다.

깜짝 놀라서 찾아보니 파키스탄은 전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고 수천 명의 사망자와 3천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했다.

이 지구 단위의 폭탄같은 힘은 인류가 가진 어떤 기술과 힘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미증유의 재난으로 자연과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처참하게 망가뜨려버렸다.

게으른 관찰자처럼 기후위기를 지켜보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기후위기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데 어째서 그 피해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입은 것일까 괴로웠다.

그 어긋남이 기후위기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 이번 기후정의 강좌를 듣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강의 초반에 보았던 <불평등이 재난이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같은 지역에 같은 양의 비가 내려도 언덕 위의 견고한 주택에 사는 사람에게는 낭만이 되지만, 저지대의 반지하에 사는 사람에게는 재난이 된다.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메타포가 아니라 재난이란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영화보다 잔인한 현실이 마음이 아팠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지방이 서울보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보다, 원주민이나 유색인종이 백인들보다, 남반구가 북반구보다 낭떠러지같은 재난에 더 가까이 서있다.

아니 그 쪽으로 밀려난다.

처음엔 해수면 상승으로 위기감을 겪는 나라들로 부터 시작된 기후위기 대응이 수십년에 걸쳐 느긋이 여러 국제회의와 협의를 진행하는 동안 기후위기의 직접적인 원흉인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업들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와 함께 시장만능주의의 틀 아래에서 제한된 정책과 규제들로 ‘그린워싱’의 대향연을 펼치며 실질적이고 절박한 해결책을 피해가기 바쁘다.

그 와중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시민사회는 다층적이고 다양한 관점으로 확대되어 가는 이 기후위기가 단순히 환경위기라는 납작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지구적 불평등과 사회정의의 맥락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와 함께 시장주의적 기술적 해법을 반대하며 반자본주의, 반식민주의의 지향성을 가지고 발전해나가는 기후정의운동!

해법을 찾기 위해선 뿌리가 필요하다며 누가 결정을 내리는지, 누가 이득을 보는지, 누가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는지, 어떻게 권력이 재분배 되는지를 살펴보는 민중적 해법의 렌즈를 가지고 ‘우리는 같은 태풍속에 있지만 같은 배를 탄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해나간다.

이미 파국이 눈앞에 닥친 것처럼 위기감이 팽배하지만, 돌아보면 국제사회의 대응은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너무도 안일하고 답답한 측면이 있다.

오죽하면 수십년간 연구하던 과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는 지경이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허술한 대응안에서도 기후정의를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연대는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더 넓고 촘촘하게 짜여져온 역사와 성취가 보인다.

절대로 만족할 수 있는 대응도 속도도 아닐지언정 세계기후운동의 변화추세는 뚜렷하게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처럼 게으른 시민도 수십년간 싸워온 동료시민들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된 기후위기강좌를 만나 별볼일없는 행동일지라도 바다에 물 한방울을 보탠다는 마음으로 작은 노력들을 해 볼 것이다.

우리의 연결이 곧 우리의 힘(Our strenth is in our connection)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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