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가로쓰기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도 이상설 선생이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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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계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했던 1905년 을사늑약. 시간은 120년이 흘러 ‘을씨년 스런’ 을사년이 돌와왔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 영토를 벗어나 최초로 무장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인물이다. 상해임시정부 보다 5년이나 앞섰다.
그의 수많은 업적을 역사적 평가로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지적이 최근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이상설 선생에게 수여한 서훈(2등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격이 상향돼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본보는 그동안 보도한 기사를 보충하고 첨가해 ‘이상설 다시보기’ 기사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우리나라 최초로 망명 임시정부를 수립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로 무장투쟁 근거지인 한인 기지촌과 군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로 무상교육을 도입한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로 수식을 가로로 쓴 산수교과서를 만든 사람은?

답의 주인공은 모두 동일인이다. 해당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교육자인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이다.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 태생으로 27세에 성균관장에 임명된 유학자이자 최초로 망명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운동가다.
우리나라 최초로 가로쓰기 산수 교과서를 편찬했고 근대식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워 최초로 무상교육을 실천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협동회’를 조직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상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 체결되자 을사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들은 이상설 선생은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동녕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엔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만주 용정촌으로 간다.



이상설 선생은 1906년 이곳에서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이상설을 중심으로 정순만·이동녕 등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해 사재를 출연했다.
건물 면적은 231m²로 정도의 규모에 학생 22명으로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다,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1907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정사로 파견된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1909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이승희·김학만·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시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해외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 기지를 건설했다.
1910년에는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기 위해 유인석·이범윤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1914년 보재 이상설 선생은 최초의 망명정부를 세운다.
그는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됐다. 상해 임시정부(1919)보다 5년이나 앞섰다.
이상설 선생은 유학자이면서 누구보다 신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성균관장 재직시 최초로 서양식 수학과 과학교과를 도입했다. 그는 직접 ‘산술신보’ 라는 수학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쓰기 수식을 사용한 교과서로 기록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한국어를 포함 5개국어에 능통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유학자이면서 과학과 산수, 법학에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학자로서 그의 삶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