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역사의 시계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왔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했던 1905년 을사늑약. 시간은 120년이 흘러 ‘을씨년 스런’ 그 을사년이 돌와왔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 영토를 벗어나 최초로 무장독립투쟁 기지를 건설하고 임시정부를 세운 인물이다. 상해임시정부 보다 5년이나 앞섰다.

그의 수많은 업적을 역사적 평가로 제대로 담지 못했다는 지적이 최근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이상설 선생에게 수여한 서훈(2등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격이 상향돼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본보는 그동안 보도한 기사를 보충하고 첨가해 ‘이상설 다시보기’ 기사를 연재한다.(편집자 주)

 

1909년 이상설 선생과 이승희 선생이 한흥동 기지촌을 건설한 이래 중국 미샨(밀산)시에는 한인들이 몰려들었다.

맹고군 전 미샨시 부시장(조선족, 역사학자)이 공동으로 저술한 ‘밀산조선족백년사’는 이에 대해 “1909년 한흥동이 건립된 이후로 한흥동에는 빈곤한 조선인들이 줄레 줄레 모여들었다”고 기술한다.

이렇게 유입된 한인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1936년에 밀산의 거주민은 2만5088호이고 인구는 15만483명이다. 그 가운데 조선인이 2650호이고 인구는 1만1730이다”(밀산조선족백년사)

새로이 유입된 한인들은 곳곳에 정착해 한인촌을 형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논 농사를 지었다.

생활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밀산조선족백년사’에선 “거개가 자체로 토지를 개간할 능력이 없고 해마다 재해로 생활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려웠다”고 기술했다.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시에 위치한 조선족 해방신촌 마을 전경 (사진=김남균 기자)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시에 위치한 조선족 해방신촌 마을 전경 (사진=김남균 기자)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시 조선족 자치마을 해방신촌 노인회  공연 모습 (사진=김남균 기자)
중국 헤이룽장성 미샨시 조선족 자치마을 해방신촌 노인회  공연 모습 (사진=김남균 기자)

 

이상설, 이승희 선생이 한흥동 기지촌 건설 이후로 미샨시는 독립운동의 거점기지로 변한다. 1910년 안창호 선생등이 활동한 신민회가 이곳에 ‘십리와’ 한인 기지촌을 건설한다.

1910년 홍범도 장군도 합류해 한인 학교를 세우고 무관학교까지 세웠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서 경제적으로 빈곤한 농민들과 함께 논을 일구고 교육을 통해 독립 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정착한 한인들은 다른 민족과 달랐다. 옥수수와 밀 등을 주식으로 하는 여타 민족과 달리 한인들은 이곳에서도 유독 벼농사를 고집했다.

이상설 선생과 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선택한 미샨은 150년 전 만해도 인가가 없었다.

맹고군 전 미샨시 부시장은 “미샨은 1889년 까지 청나라 황실의 사냥터였다. 그래서 이곳엔 아무나 못 들어왔다. 1989년 산동 반도에서 한족이 이주해 농사를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현재의 미샨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상설 선생은 왜 미샨시를 선택했을까?

배경 : 중국 헤이륭장성 미샨시 홍카이호
배경 : 중국 헤이륭장성 미샨시 홍카이호

 

맹 전 부시장은 “미산은 봉밀산과 홍카이호(흥개호)가 있다. 홍카이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담수 호수다. 봉밀산의 봉은 꿀벌을 가리키는 한자다. 가을이면 저 산에 벌이 많아 꿀이 흘러내렸다고 해서 봉밀산이라고 부른다. 땅이 비옥하고 홍카이호가 있어 물이 많아 벼 농사 짓기에 딱 좋은 곳이다. 거기에다 조선 국경과 거리가 있어 일본군의 기습을 피할 수 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유사시 러시아로 피할 수 있어 무장투쟁기지로 적합한 곳”이라고 밝혔다.

안중근과 이상설, 그리고 최재형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1879~1910)의사.

그는 거사 후 뤼순 감옥에서 일본헌병의 취조를 받을 때 이상설 선생에 대해 “이분(이상설)의 포부는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시국을 간파하고 있다”(읽기쉬운 이상설 편정·윤병석외)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와 이상설 선생은 어떤 인연이 있을까?

둘은 동의회(同義會)의 멤버였다. 동의회는 1908년 주러시아공사 이범진(1852∼1910)의 주도로 결성됐다. 그는 군수금 1만 루블을 아들 이위종(1887∼?)을 통해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보냈다.

1908년 4월에 얀치헤(연추, 煙秋)에서는 최재형(1858~1920), 이범윤, 안중근 등이 발기인으로 나서 동의회를 결성했다.

회장에는 이위종이 선임되었고, 최재형이 총재를 맡았다.

이때 안중근은 동의회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동의회 결성과정만 보더라도 이상설 선생과 연관된 것을 알 수 있다.

회장을 맡은 이는 이위종은 이상설 선생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될 당시 특사단의 일원으로 통역을 맡았다.

동의회의 본부는 얀치헤에 두었고, 블라디보스톡에 지회를 설립했다. 동의회는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활동했다.

1909년 2월 얀치헤에서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12인은 손가락 하나씩을 끊고 동의단지회 (동의단지동맹·同義斷指同盟)를 맺고 동의회와 같은 성격의 항일운동단체임을 결의했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당시 연해주에서 발행된 해조신문에 따르면 안중근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대표로 있는 대동공보(大東共報〉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최재형은 누구인가? 러시아 고려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상해임시정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이상설 선생과 동의회, 권업회 등을 결성하고 무장독립투쟁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투쟁 역사 가이드로 활동하는 조미향 해설사는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선생이 운영하는 대동공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대동공보 사무실에 머물며 거사 계획을 마련했다. 동의회 등 이상설 선생과의 관계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홀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마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미완의 역사공간인 러시아 블리다보스특과 얀치헤. 이곳에서 동의회와 최재형 선생의 족적을 찾다보면 우리는 이상설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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