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8일, 빵과 장미를 달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여성노동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알고 있나요? 그날 이후 우리 사회 여성 인권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충북인뉴스는 '3·8 여성의날 투쟁 충북기획단'이 3·8 여성의날 115주년을 맞아 기획한 연재물 6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글 : 충북녹색당 사무처장 정미진

이 세상은 무수한 존재의 노동으로 유지된다. 여성 역시 언제나 노동을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든 사람의 노동은 평등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여성의 노동이 그렇듯이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 비정규직의 노동은 열악하고, 소외되고, 착취당한다.

이들의 노동이 고립되고 착취당하는 과정을 들여다보자. 우선 마치 노동에 계급과 성별이 정해져있듯 ‘000만 하는 노동’ 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다. 이주민만 하는 노동, 장애인만 하는 노동, 여성만 하는 노동. 아마 다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을 것이다. 다음은 특정된 그 노동이 저평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정해지기보단 적은 임금 혹은 무임금, 긴 노동시간, 열악한 환경인지 아닌지로 정해진다.

사회가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돌봄’을 높은 가치로 호명한다. 코로나팬더믹 당시 급증하는 감염질환자들을 한정된 보건인력이 감당해야 하거나 학교가 문을 닫아 돌봄의 공백이 생겼을 때. 고령화되는 사회에서 가족들이 돌봄의 책임을 거부할 때. 직장을 다니며 어린아이를 키울 수 없어 누군가 자신의 직업을 내려놓아야만 할 때.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며 병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정말 많은 순간에 ‘돌봄’의 중요성을 소환한다.

하지만 돌봄은 ‘노동’으로 대해질까? 여전히 돌봄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에 기대고, 비용을 어쩔 수 없이 지급해야 한다면 최저비용으로 지급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여전히 가족공동체가 소화해야 할 강제노동으로 대해진다. 돌봄이 필요한 이들,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 모두가 고통받는 현실이다.

노동으로서 돌봄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동시에 여전히 성별화되고 계급화되어있다. 그래서 그 노동의 주체였던 여성은 끊임없이 돌봄노동에 쓰인 굴레를 벗기기 위해 싸워왔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각종 육아, 가사, 요양 등의 일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라 외쳤고 비용을 받아도 저임금, 고강도가 만연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싸웠다.

돌봄의 책임은 개인과 가족을 넘어 국가와 사회공동체가 함께 나눠야 한다고 외쳤고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가는데 충분히 누려야 하므로 공공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그 투쟁의 역사가 후퇴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말 ‘민간주도의 사회서비스 확대, 복지체계 통폐합’ 계획을 발표했다. 돌봄노동 제공처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사회서비스원 등의 각종 복지체계의 예산을 삭감하고 무력화했다. 돌봄을 제공받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국가가 보장하는 서비스의 형태가 아닌 ‘선별적인 현금’을 지급한다. 쉽게 말해 국가와 사회는 노동으로서 돌봄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돌봄에 대한 책임을 다시 개인과 시장에 떠넘기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현금으로 생존이든 존엄이든 알아서 해결하라는 공표다.

그래놓고 윤석열 정부는 ‘양질의 사회서비스를 위해 사회서비스 고도화’를 천명했다. 개인과 시장에 내맡겨진 돌봄은 절대 필요한 이에게 양적, 질적으로 충분하게 제공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또 다시 사람들을 속이고 우롱하고 있다.

멈춰설 수 없다. 여성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소외되고 착취되어온 이들이 직접 나서 돌봄동에 쓰인 굴레를 벗겨낼 것이다. 신성하고 중요하다는 공허한 구호가 아닌 노동으로서 그에 마땅한 조건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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