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객원기자

▲ 이재표 객원기자
재건(再建)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운다는 뜻이다. 재건이란 단어를 애호했던 집단이 1961년 5.16군사 쿠데타 주도세력이다. 박정희 소장은 정변 후 단 사흘 만에 3권을 장악한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한다. 6월6일 제정·공포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재건회의는 최고통치기구로서 자리매김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5.16쿠데타에 대해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은 또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말해 천박한 역사인식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이 말한 두 개의 판결 중 하나가 1975년의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이에 앞서 1차 인혁당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지하조직 인혁당이 국가변란을 모의했다”며 개혁 인사와 교수 등 수십 명을 잡아들인 사건이다. 고(故) 박현채 교수 등 13명이 재판에 넘겨져 각각 징역 1∼3년의 실형과 집행유예를 각각 선고 받았다.

그러나 당시 일선 검사들이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가혹행위를 저질렀다’며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기도 했다.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독재정권 유지에 혈안이 돼있던 1974년에 불거졌다.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을 조종하고 있다며 1차 인혁당 관련자들을 구금한 것이다. 23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이 중 8명은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국제법학자회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또 2007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사형과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전원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결국 있지도 않은 인혁당을 재건한 것은 재건의 애용자 독재정권이었다.

우리는 최근 또 다시 재건이란 단어와 조우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수사권, 기소권이 보장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유족들의 단식, 노숙농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유족들이 설치한 노란리본을 철거하겠다는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른바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다.

서북청년단의 역사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서 토지 무상분배 등 사회개혁이 이뤄졌다. 식민지시대부터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들은 상실감이 컸다. 이들이 월남해 만든 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강령은 참신했다. 조국의 자주독립과 균등사회, 세계평화를 지향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주 4.3항쟁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좌익척결을 빙자한 백색테러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미군정의 하수인 역할을 했으나 이들에게는 봉급이 없었다. 대신 유지들이 돈을 갹출하거나 미군정 원조물자를 유출해 돈을 챙겼다.

그런데 서북청년단을 재건한단다. 법학전문가들은 서북청년단이 암살과 테러, 좌익분자 척결을 빙자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단체이므로 ‘범죄단체조직’ 혐의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재건위 대표를 맡고 있는 배성관씨는 육군 대령 출신으로 원조 서북청년단의 성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서북청년단이 북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긴 상실감에서 시작했다면 서북청년단 재건위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의 범죄 예비음모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유신은 충실한 심복 김재규의 총탄으로 종식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30여년 만에 다시 유신을 추억하거나 경험하고 있다. 적폐일소, 국가개조, 비정상의 정상화, 재건까지….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단어들이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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