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으로 진입하는 계절의 문턱은 언제나 아름답다. 연초록 새순은 5월이 지나면서 짙은 초록색으로 변해가고 이름 모를 들풀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살찐 몸으로 꽃바람을 연주한다. 구룡산 자락으로 나들이를 나간 원흥이 방죽 두꺼비 떼는 개발의 먹구름이 밀려드는 것을 알고 있음인지 총총 걸음을 더한다. 방죽 가의 창포는 환경의 파수꾼인양 칼 잎새를 곧추세우고 있는데 개발의 삽질은 아랑곳없이 산허리를 가르며 상처를 낸다.

인간은 환경의 주체이나 자연의 일부분이다. 선인들은 자신을 자연에 포함하여 해석하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지극히 오만한 착각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로 하여금 엘리뇨 현상이라든지 오존층에 구멍이 나고 있음에도 ‘나는 괜찮겠지’하며 자멸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천(天) 지(地) 인(人)의 삼박자가 맞아야 인류는 번창할 수 있는데 요즘은 문명의 엇 박자가 굉음을 내며 끼어 들어 그 조화를 깨고 있다. 모름지기 인간과 자연은 악수를 하고 문명과 비 문명은 어느 시점에서 만나 코러스를 불러야 마땅한데 택지개발 지구인 산남3지구 원흥이 방죽일대는 문명과 비 문명이 충돌하며 불협화음을 빚는다. 원흥이 마을 일대는 1305년 목판본 금강경(金剛經)을 인쇄한 원흥사(元興社,元興寺)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절터 마을이다. 아직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절터, 탑 부재, 기왓장, 전설 등을 종합하면 그 개연성은 한층 높아진다.

금강경은 선종(禪宗)에서 수행에 관한 경전으로 근본이 되는 불서(佛書)다. 영어로는 간략하게 다이아몬드 경(Diamond Sutra)라고 부른다. 금강경을 인쇄하였고 절이 있었다면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삼보일배(三步一拜)의 고행이 필히 뒤따랐을 것이다.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貪,嗔,癡)을 끊어내려는 선인의 수행이 끊긴지 5백년만에, 다시 그 자리에서 원흥이 방죽 두꺼비를 살리려는 환경단체의 삼보일배가 재현되고 있으니 서방정토(西方淨土)와 드림랜드를 실현하려는 근본 뜻에는 별로 다를 점이 없다.

향불 꺼진지 수 백년이 지났고 먹빛장삼은 자취를 감추었어도 쾌적한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려는 사람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두타행(頭陀行:집착을 버림)을 계속한다. 두꺼비는 구룡산 자락을 오르는데 사람들은 두꺼비 걸음으로 도심을 향한다.사바의 욕심을 덜고 백팔번뇌의 고리를 끊는다면 이 세상은 한층 아름다워지련만 공룡 같은 포클레인이 그 까닭을 알 턱이 없다. 청주의 마지막 허파가 결단나는 판인데 어찌 가섭(迦葉:석가모니의 제자)과 같은 염화미소가 나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민속에서 두꺼비는 ‘집 지킴이’이나 재복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전래동화 ‘두꺼비 신랑’은 언니들의 모함으로 신랑을 잃은 뒤,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랑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삼국유사에 보면 두꺼비의 사촌 격인 개구리가 지배계층과 접목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해부루(解夫婁)에 이어 동부여의 왕이 된 금와왕(金蛙王)은 얼굴 형상이 금빛 개구리 모습이었다.

이처럼 개구리와 두꺼비는 우리네 일상생활과 밀접한 동물이다. 어릴 적 냇가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부르던 노래가 문득 생각난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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