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 이미 꺾인 상황에서 유일한 확장의 통로는 ‘여성성’
부드러운 리더십 이면은 아버지 역사 지키려는 ‘보수 전사’

박근혜 후보의 여성성 논란
송광호·이용희가 보는 박근혜

▲ 송광호 의원(왼쪽)은 박근혜 후보의 모습에서 육영수 여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용희 의원은 충북의 남부 3군에서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인 박정희와 닮은꼴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부드러움과 강력한 리더십, 부패와 권력다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 리더십이 필요하다. 여성은 위기에 강하고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지난 7일 오후 여성유권자연맹 주최로 열린 행사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이제는 한국에서도 여성대통령이 나와야한다는 취지로 한 연설이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청와대를 떠났던 박 후보는 1998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그해 4월 대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2001년 대선을 앞두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하며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아직 때가 아님을 느끼고 대선 전에 당에 복귀했다. 이회창 후보의 대선패배 이후 박 후보는 10여 년 동안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다.

노무현 탄핵 후폭풍으로 당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였을 때는 천막당사를 근거지 삼아 당을 재도약시켰으며, 특히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며 대세론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박 후보의 대세론은 2011년 10·26 서울시장 재보선 당시 안철수의 등장만으로도 허무하게 풀이 죽었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결정된 이후에는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지뢰밭 가운데 놓이고 말았다.

야권단일화 프레임 속에서 박 후보가 노릴 수 있는 유일한 확장의 통로는 여성대통령론이다. 아버지인 박정희 향수는 이미 누릴 대로 누렸고, 이제는 ‘육영수 리더십’을 통해 ‘플러스 알파’를 최대한 찾아보자는 것이다.

▲ 현재 박 후보가 노릴 수 있는 유일한 확장의 통로는 여성대통령론이다. 아버지인 박정희에 대한 향수 외에 ‘육영수 리더십’을 통해 ‘플러스 알파’를 찾고 있다는 분석이다.

제천·단양이 지역구인 송광호 중앙선대위 부위원장은 박근혜 후보의 육영수 리더십에 대해 “두 사람 사이에는 세대 차이가 난다. 육 여사는 현모양처 내조자의 이미지였다면 박 후보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여성 리더십이 있다”면서도 “시장에서 상인들의 흙 묻은 손을 잡는 모습에서는 육 여사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송 부위원장은 또 “그동안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장기집권과 부정부패 등의 문제가 늘 뒤따랐다. 이에 반해 여성 정치인, 특히 박 후보는 섬세하고 투명하며 담백하다. 남성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고 인권, 부패척결, 혁신 등의 과제를 잘 수행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장년층과 노년층에게 있어서 박근혜는 육영수와 자연스럽게 오버랩 된다. 박 후보는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영애(令愛)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역할을 전환했다. 박 후보는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육 여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했다. 박 후보는 1977년에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을 본격화한다. 이는 아버지가 추진했던 새마을운동의 2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육영수 리더십의 효과는 박 후보의 불통(不通)이미지를 중화하며 포용·화합을 부각시키는데 효과적일 것으로 분석됐다. 본격적인 대선행보가 시작되면서 非박계를 포용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참배한 것은 이 같은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박 후보 홈페이지에 미소 짓는 육 여사의 흑백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실제로 박 후보는 ‘아버지는 경제성장을 이뤘고 나는 복지국가를 이루겠다’는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러나 과거사 정국과 당 쇄신 논란 이후 박 후보는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NLL 논란에 대해서는 10월19일 서울선대위 출범식에서 “2007년 정상회담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다는 건가. 이런 사람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정수장학회와 관련해서는 “김지태씨가 설립한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씨의 헌납 재산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국내 독지가나 해외 동포들의 성금과 뜻을 더해 새롭게 만든 것”이라며 정면돌파를 택했다. 박 후보에 대해 ‘겉모습은 어머니지만 속마음은 아버지’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宋 “새로운 시대의 여성 리더십”

여성대통령 당위론을 부쩍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는 다시 강해졌다. 대선 후보 출발 당시와 비교해 발언 중심도 바뀌고 수위도 강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육 여사의 생가가 있는 옥천(보은·옥천·영동)을 지역구로 무려 50여년이나 정치활동을 해온 이용희 전 의원이 할 말이 많다. 이 전 의원은 1963년 민주당 공천을 받아 6~8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육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2001년 작고) 전 의원에게 내리 3연패한다. 중선거구제로 개편되면서 1,2등이 당선된 9, 10대 총선에서는 육 전 의원과 함께 당선돼 함께 의정활동을 했다. 그러니까 육 전 의원은 이 지역에서 내리 5선을 했다.

이 전 의원은 정치라이벌이었던 육인수 전 의원에 대해 “죽은 사람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면서도 “청주고등보통학교를 나오고 일본의 무사시노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고등학교 수학교사를 하다가 처남이 군사쿠데타로 집권을 하자 정치로 뛰어들었다. 수학선생님답게 성품은 곧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충북에선 대통령 대접을 받을 만큼 막강한 권력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 의원은 충북, 특히 남부3군 지역에 육 여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음을 인정했다. “육 여사는 후덕하고 점잖았다. 굳이 우리 지역이 아니더라도 인기가 좋았다”면서 “지금도 육 여사의 생일이나 기일에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부 구미에서 버스가 몇 대씩 오는 것만 보더라도 육 여사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그러나 “박 후보가 모든 면에서 아버지를 닮았다”고 주장했다. 이 전 의원은 “18대 국회 당시 나와 박 후보의 자리는 5m 남짓 떨어져있었다. 내가 육 여사 생가(옥천군 옥천읍) 복원을 위해 내 돈은 아니지만 국비와 지방비 70~80억 원은 끌어왔는데, 한 번도 먼저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를 닮았다면 그렇게 독선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 의원은 “헤어스타일만 빼고는 모두 아버지”라는 한마디를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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