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철 정치부 기자

인동초(忍冬草)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어느덧 3년 하고도 열흘이 흘렀다. 지역의 한 일간지 여기자 선배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최근 출간한 김 전 대통령의 평전 ‘새벽’을 펼치며 어찌된 일인지 눈물부터 흘렀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기는 길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 안 하는 것이다. 나쁜 신문 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며 “대선이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고 적었다.

매년 8월 즈음에 김 전 대통령 서거 때만 되면 한 여기자 후배가 떠오르곤 한다. 때는 3년 전 8월 초 중순. 김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서울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뒤 병세가 악화되면서 기자들은 소위 ‘뻣치기’로 수 일을 병원에서 먹고 자며 지내야 했다.

연일 천주교와 개신교 성직자들이 김 전 대통령의 건강회복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고 기자들은 기도회 스케치와 김 전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하루 전, 병원 쪽으로부터 더 이상 그가 회복 할 가망이 없고 임종을 준비해야 한다는 통보를 들은 김 전 대통령 측의 최경환 비서관은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순간 김 전 대통령의 살아온 족적과 함께 ‘현대사 특강’이 진행됐다. 5번의 죽을 고비, 그 가운데 1973년 도쿄 피랍사건과 1980년 사형선고의 비화를 생생히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기자 초년병들에게는 살아 있는 역사공부가 됐다.

최 비서관이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1980년대 신군부에 폭압을 당하시고…” 하던 찰나, 한 여기자가 용기 있게 손을 번쩍 들며 최 비서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했다.

“근데 신군부가 누굽니까?” 신군부를 성은 신이요 이름은 군부인 사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일순 주위가 조용해졌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함께 같은 경찰서를 출입하며 친분을 쌓고 있던 여기자였기에 그 광경을 본 기자도 당황했다.

1980년 이후 태어난 이 여기자는 훗날 자신의 매체 기자수첩에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기자들에게 1980년 이전의 한국 현대사는 너무 낯설고 생경하다고 적은 것으로 기억된다.

소위 스카이 대학 출신이었던 기자였지만 가방끈과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는 별개였다.
기자든 성직자든 교사든 어느 누군가에게 어떤 것에 대해 전달하거나 가르치는 사명이 주어진 이들은 역사의 줄기를 찾아 이해하는 깊은 안목이 필요하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왜곡된 역사와 편견의 세상을 막고 올바른 역사와 상식의 세상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장이 치러진 6일 동안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었다. 국회 빈소에서 조문객들에게 근조 리본을 달아주던 30대 여성 자원봉사자는 “서점에 가거나 인터넷 블로그를 뒤져 보라”고 조언했다. ‘인간 김대중’을 몰랐던 젊은 기자들이 그를 통해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일기에서 언급했듯이 그의 삶은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해 혼신을 다한 일생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커다란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다시 발견한 젊은이들이 늘어날수록 그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를 향한 참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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