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한 사람이 있다. 전쟁통에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이다. 혈혈단신 의탁할 곳도 없이 전국을 정처없이 떠돈다. 그런 그가 한 곳에 머물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말이 없다. 누가 말을 시켜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입을 열지 않는다. 말을 시킨 이가 화를 내고 위협해도 그는 묵묵부답이다. 시키는 일은 할지언정 말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말을 잃은 것도 같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이 있어 그에게 말을 붙이고 다정하게 대한다. 그에게 일을 주고 밥을 주고 잠자리를 준다. 그의 입을 열어보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여전히 그는 말하지 않는다. 이젠 주어진 일도 하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가 의아하지만 그저 참고 또 참고 기다린다. 이러는 사이 그 사람을 두고 나쁜 소문이 돌고 불신도 생겨난다. 마지못해 그는 정처없이 떠돌던 그를 떠난다. 그러자 떠돌이는 바로 죽는다.

위 이야기는 허먼 멜빌(1819~1891)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1853년)를 읽고 난 뒤에 살짝 각색한 것이다. 어느날, 장 콕토는 화가 고흐에 대한 세평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고흐를 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빈곤 속에서 무명으로 죽은 사실은 잊고 있다. 당신들은 타인의 고뇌에 흥미를 갖지만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 고흐라는 단어의 자리에 바틀비라는 단어를 넣어도 무방하다. 바틀비 역시 빈곤 속에서 무명으로 죽었다.

자진해서 고통당하려 애쓰는 사람은 없다. 어디까지나 고통은 외부에서 온다. 난데없이 밀어닥치는 불운을 모두가 겪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끝없는 불운 속에서 겨우 숨을 쉬며 살기도 한다. 원하지 않는 고통에 처하는 그런 불운은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큰 재앙이다. 바틀비는 피할 방도 하나 없이 맨몸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고통인지 아는 사람이었고 그 불운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사람이었다.

한 사람에게 밀어닥치는 불운은 자연이라는 외부에서도 오지만 사회라는 외부에서도 온다. 바틀비가 겪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소설에선 그려지지 않는다. 다만 바틀비의 상태로 짐작해보건대, 그는 한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고통 안에 놓여있었다는 점이다. 호의를 가지고 꾸준히 바틀비를 바라본 변호사일지언정 그는 바틀비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고통의 공감보다는 고통의 근거를 찾아내려 애썼기 때문이다. 변호사처럼 따뜻한 사람도 없지만 그의 문제는 바틀비의 고통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너무나 다른 처지의 타인을 공감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변호사는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자신이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의 넓이와 깊이가 크고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지는 몰라도 공감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고통 속에 죽어가고 누군가는 고통을 모른 채 사는 것, 그 또한 고통 아니랴.

변호사 사무실에서 내쳐진 뒤 끝내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간 바틀비에게 변호사는 더할 나위없는 연민을 느끼며 외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변호사는 슬퍼한다. 어쩌면 바틀비의 죽음이라는 외부 사실이 이제 변호사의 고통으로 밀어닥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짐작일 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변호사는 꾸준히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런 위치에 있었다. 이해의 범주로 들어오지 않는 바틀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자신의 요구가 부당한 게 아니라는 확신에 일말의 의심이 없었다. 자선을 베푸는 자에게 자선을 받은 자는 흡수되어 들어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의 요구를 변호사는 눈치 채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변호사야말로 바틀비보다 훨씬 둔감하고 무력한 사람이리라.

우리 대부분은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평판과 타인의 시선과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아무 외피도 없이 거대한 고통의 한 복판에 놓인 바틀비의 절박함에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세상의 영역이 확실하고 명료한 세상의 영역보다는 훨씬 더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진실하다. 그 진실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력함은 더욱 심화되고 곧이어 폭력으로 변질되고 만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도 있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있다. 민감한 사람일수록 고통은 더욱 강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바틀비와 같이 매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는 사람에게는 보존의 욕구만이 남는다. 잠자리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는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기 쉽다. 바틀비는 달랐다.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을지언정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필경사 바틀비는 위대하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위엄을 보존한 채 쓸쓸히 죽는다.

바틀비가 원한 것은 너와 내가 함께 있다는 실감이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도 좋은. 그것은 우리 본연의 모습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신간소개

처음 만나는 우리문화
이이화/ 김영사/ 1만5000원

역사학자 이이화가 들려주는 구수하고 익살스러운 문화 교양 스토리, 처음 만나는 <우리문화>. 우리 역사를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한국의 대표 역사학자 이이화가 전하는 문화 속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국인의 뿌리’, ‘도시와 장터’, ‘토속신앙과 외래신앙’, ‘명절과 통과의례’, ‘의식주’ 등 여덟 갈래의 문화 트렌드를 따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K·POP 세계를 홀리다
김학선/ 을유문화사/ 1만5000원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대중음악을 만든 사람들 <K·POP 세계를 홀리다>. K-Pop의 근원과 역사를 알려 주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기억될 만한 사람들과 노래를 소개한 책이다. 아이돌과 함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K-Pop이 1970년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지금의 K-Pop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살펴본다.

남성 퇴화 보고서
피터 매캘리스터/ 21세기북스/ 1만5000원

진화론에 맞서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사회가 역사적으로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그것도 남성의 역사만 콕 집어서 말이다. 호주의 고고학자이자 고인류학자인 피터 매캘리스터의 <남성 퇴화 보고서>가 바로 그 책이다. 그는 처음에는 남성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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