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15일 전국의 신문들은 ‘정신대’기사로 온통 들 끌었습니다. ‘정신대 국교 생까지 끌고 갔다’ ‘마침내 꼬리 잡힌 일본의 야만’ ‘정신대 금세기 최대 국가범죄’ ‘정신대사냥 일 교사가 몰이꾼’ ‘아빠가 찾는다 줄넘기하다 끌려가 ’ ‘정신대 전모 역사 앞에 ’ 등등 1면에서 톱으로 시작한 기사는 사설 해설 칼럼 사회반응 낙수에 이르기까지 전 지면을 도배하다시피 새카맣게 뒤덮었습니다. 온 나라는 갑자기 반일 감정으로, 애국심으로, 오랜만에 민족의 정기가 되살아 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정신대문제는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해전 일본인 할머니 이케다씨에 의해 공개된 것을 가지고 뒤늦게 신문들이 소동을 벌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일제시절 서울 남산동 방산국민학교에 여교사로 재직하던 이케다씨는 자신이 담임을 맡았던 6학년 중에서 ‘발육 및 영양상태가 좋고 품행 방정하고 성실’한 여자어린이를 뽑아 정신대로 보냈습니다.

종전과 더불어 일본으로 돌아간 이케다씨는 나이 어린 제자를 성 노리개로 보냈던 것에 심한 자책에 시달리다 46년 만인 1991년 후지TV취재진과 함께 한국에 와 옛 제자들을 찾아 속죄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모든 국민학교에서는 때늦은 정신대 찾기 소동이 벌어졌고 여기 저기서 사실이 확인되면서 신문들이 한바탕 법석을 떤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닫자 일제는 조선 땅에서 소위 ‘공출(供出)’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포탄 만들 쇠가 없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놋그릇에 숟가락 젓가락까지 걷어갔고 마을이나 학교에서는 열 두 살 짜리 어린 소녀까지 사냥하듯 마구 차출해 ‘근로정신대’ ‘종군위안부’란 이름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당시 민간에서는 이를 ‘처녀공출’이라 부르면서 딸 가진 부모들은 자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습니다. 당시 일본으로 끌려 간 정신대는 무려 20만이나 됩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이 되고 그로부터 반세기가 가까이되었지만 정신대문제는 망각 속에 정부도, 그 누구도 나서서 입을 열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20만이 넘는 딸자식들이 생지옥으로 끌려가 짐승처럼 능욕을 당하며 영혼과 육신이 망가졌지만 배상금 3억 달러에 눈이 먼 공화당정부는 이들의 한을 도외시해 버렸습니다.

그러고 50년, 그것도 가해자인 일본인에 의해 비로소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 것을 대단한 특종이나 한 것처럼 신문들이 난리를 떤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였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도 매주 수요일 12시면 어김없이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정신대에 끌려갔다 돌아와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있는 할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항의 시위를 벌입니다. 민족이라면 누가 이 할머니들의 애끓는 오열에 눈물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오늘 한 여자탤런트의 정신대누드파동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는걸 보면서 과연 민족정기란 무엇인지, 새삼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네티즌들의 성난 함성에 당사자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지만 할머니들의 분을 삭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돈 버는 일이 아무리 중하기로서니 어찌 할머니들의 한을 알몸으로 바꿀 수 있으며 아무리 상술이기로서니 민족의 치욕을 팔아 돈을 긁어모으려는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족의 자존은 간 곳이 없고 배금주의의 노예가 되어 통한의 역사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는 병든 이 사회의 추악한 모습에 그저 아연할 따름입니다.

때 이른 황사가 부옇게 하늘을 뒤 덮고있습니다. 봄은 성급히 달려오는데 세상은 여전히 소란하고 어지럽기만 합니다.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필자 뿐 만은 아닐 터입니다. 
                                                                                / 본사고문 kyh@cbi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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