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같은 돼지 살처분에 시름…생계 걱정에 불안
예방접종 늦어 피해 확산, 자돈 가격안정 대책 필요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읍 소재지에서 신니면 방면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마을 입구가 나타난다. 비교적 넓은 농지에 한적해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얼마전 이 마을 곳곳에 낯 선 시설물이 들어섰다. 제법 넓은 땅이 불룩이 솟아 있고 그 위는 초록색 포장으로 덮어져 있다. 주변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말뚝을 박아 휀스를 설치했으며 한쪽에는 안내 표지판도 세워졌다.

▲ 여운호 씨가 집 앞 텃밭에 설치한 살처분 매몰지를 시름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축사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한쪽에는 이같은 시설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구제역으로 인해 가축을 살처분 해 묻은 매몰지다. 지난 1월 하순 이 마을 한 농가의 가축이 구제역 확진판정을 받은 뒤 반경 500m 이내에 있는 소와 돼지를 모두 살처분 했기 때문이다.

한달이 훨씬 넘도록 가축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야 할 축사는 말끔히 청소된 채 텅 비어 있다. 사료를 주고 똥오줌을 처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할 일손도 멈춘 채 적막감마저 감돈다.
당우리 유동마을에 사는 여운호 씨(69)도 1월 24일 자식처럼 돌보던 돼지 283마리를 집 앞 텃밭에 묻었다.

“꽥꽥, 울부짖는 소리 아직도 들려”

그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찾아간 기자를 마지못해 맞았다. 방금 전 까지 성경을 읽고 있었던 듯 거실 바닥엔 성경책과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묻는 말에 힘겹게 대답할 뿐 단 한번도 기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80년대 중반부터 농민회 활동을 하며 전농충북도연맹 의장까지 지낸 농민운동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식처럼 기르던 돼지를 하루아침에 땅에 묻은 뒤로 웃음을 잃어버렸단다.

“소, 돼지, 닭, 오리…. 난리도 이런 난리가 있을 수 없어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구제역 예방접종을 앞두고 있는데 인근 축사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예방적 살처분 대상이 됐단다.

“소부터 예방접종을 실시했잖아요. 돼지까지 확대할 참이었는데 조금만 서둘렀어도 모두 죽이지는 않았겠죠.”

미안했지만 살처분 당시 상황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굴삭기로 땅을 파서 돼지를 묻고 매몰지를 만드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리더군요. 돼지를 묻는 데는 두어시간 걸렸나? 그런 다음 군인 40여명이 와서 축사를 청소하고 소독하고 갔어요.”
여 씨는 자식 같은 돼지들을 손수 축사 밖으로 몰아냈다. 매몰지는 축사입구에서 불과 10여m 앞에 마련됐다. 기다리고 있던 공무원 5명이 돼지에게 주사를 놨고 하나둘씩 쓰려졌다.

“생매장 한 곳도 있다는데 그나마 다행이죠. 그래도 주사를 놨다고 금방 죽나요. 쓰러진 돼지들을 굴삭기에 연결한 집게로 서너마리씩 들어 올리는데 꽥꽥 소리지르고 발버둥을 쳐요. 지들도 죽는다는 사실을 아나보더군요. 구덩이에 들어가서도 나오려고 하고, 그러면 다시 밀어 넣고….”

그렇게 전쟁 치르듯 여 씨 농장 돼지들의 살처분은 끝이 났다. 남은 건 돼지들의 아버지로 매일 사료를 주고 똥오줌을 치워주던 여 씨의 한숨 뿐이다.
“아직도 살겠다고 꽤꽥 거리던 녀석들의 소리가 귀에서 맴돌아요. 귀여운 것들이 생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아니 내가 구덩이로 몰아 넣었으니까. 돼지들에게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죠.”

▲ 충주시 주덕읍 여운호 씨가 무표정한 얼굴로 텅 빈 축사를 가리키고 있다.
“수의사가 구제역 전파, 분통”

3남매 모두 출가해 청주와 충남 아산에서 사는 터라 여씨는 몸이 불편한 아내와 유동마을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해 온 일을 잃은 채 성경 구절로 한숨을 달래고 있다.

더욱이 시름은 돼지들을 살처분한 허전함과 미안함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살처분한 돼지들에 대한 보상도 정확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우선 살처분 하면서 마리당 10만원씩 받았다. 1㎏에 5500원씩 보상금이 지급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정도면 크게 손해 보는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새로 입식 때 까지 앞으로도 한달 이상 축사를 비워둬야 하고 새끼돼지 값이 폭등해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살처분한 농장은 가축 이동제한이 해제되고도 한달이 지나야 입식이 가능하다고 해요. 곧 이동제한은 풀린다고 하지만 새로 돼지를 키우려면 빨라야 4월 초는 돼야 합니다. 두 달 이상 축사를 비워둬야 하는 거죠. 또 12만원 쯤 하던 새끼돼지 값이 벌써 20만원을 넘었어요. 살처분 농가들이 한꺼번에 입식하면 더욱 값이 폭등하겠죠. 또 출하할 때도 물량이 몰릴 가능성이 크잖아요. 지금은 물량이 없어 돼지고기 값이 두 배 이상 올랐는데 폭락할 수도 있어요.”

그는 구제역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는 데에 당국의 책임도 크다고 주장했다. 우선 예방백신 접종이 늦었다는 것이다.
“구제역 청정지역이라는 이미지를 깨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좀 더 빨리 예방접종을 실시했다면 집단 살처분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인 얘기겠지만 이 때문에 돼지 절반 이상을 매몰처분 했다는 거 아닙니까.”

예방접종 방법은 더 기가 막히단다.
“처음에는 수의사가 농가를 순회하며 예방주사를 놨어요. 정말 어처구니 없죠. 수의사가 구제역을 전파한 거라구요. 농가에서 예방주사를 놓지 못할 것 같아 그랬나요?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으니 분통이 터질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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