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혁 규(청주교대 사회교육과교수 )

또 다시 총선이다. 매스컴은 연일 총선 관련 정치 뉴스들을 쏟아 내고 있다. 출마 예상자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선거철이면 한 밑천 잡으려는 각종 이익 집단들도 분주하다. 그리고 ‘영향력의 정캄를 실현하는 시민단체들도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치의 계절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지만 정작 유권자들은 조용하다.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체념? 탈정치적 소시민주의? 혹은, 원자적 개체의 무기력감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정치의 계절에 유권자는 언제나 주인이기보다는 객이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초들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년에 한 번씩 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시민들은 선거 날에만 자유인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나, 너무 냉소할 필요가 없다. 민초가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기회가 최소한 4년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러니, 인생 역전의 이 기회를 멋지게 활용하자!
주인 노릇 제대로 하기 위해선 우선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버려야 한다. 정치가 부패하고 정치권이 진흙탕 싸움이니 정치판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이 때묻지 않은 선비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을 버리자! 내가 탈정치(脫政治)의 영역으로 퇴행하는 것이 고상한 교양의 실현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를 위기로 몰아넣는 범죄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선거 참여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미국의 경제학자 허쉬만(A. Hirschman)이 비유적으로 구분한 ‘탈퇴(exit)’와 ‘목소리(voice)’라는 개념을 소개해 보겠다. 의사결정에는 좋고 싫음을 자유로운 참가와 불참으로 표시하는 ‘탈퇴’와 참가 여부가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좋고 싫음을 직접 표시하는 ‘목소리’로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경제적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탈퇴의 원리에 따른다. 예를 들면, 물건을 살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이에 비해서 투표 행위와 같은 정치적 행위는 목소리의 원리에 따른다. 이 경우는 선택의 범위가 좁고 그 결과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함께 영향을 받는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되었다하더라도 그가 내리는 각종 정치적 결정에 내가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내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도 선거 결과는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목소리를 확실하게 내는 것 뿐이다.
이런 원리를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순간에 유권자들이 직면하는 또 다른 상황은 의미있는 선택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후보가 그 후보 같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들어 왔다. 그리고, 이런 현실 인식은 유권자의 탈정치화를 부추겼다. 혹은 지연/학연과 같은 인습적 판단 기준에 따르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후보가 그 후보라는 식의 논리에 철저히 저항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유권자의 투표 행위를 굴절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이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정치에 놀아난 것이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많이 놀아난 사람과 적게 놀아난 사람을 준별(峻別)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진보를 위해서 여전히 중요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보는 감식안이 고통으로 얼룩진 정치 현실 속에서 더디지만 확실한 진보를 일구기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다행히 유권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선관위에서 각종 출마자들에 관한 정보를 정성스럽게 인쇄하여 각 가정에까지 배부한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각종 시민단체들이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서 경쟁하고 있다. 이 얼마나 주인 행세 제대로 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되고 있는가!
여기서 약간의 훈수를 두자면 여러 자료 중에서 낙천낙선대상으로 거론되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부패 관련 인사, 선거법 위반 인사, 경선 불복자들, 헌정 파괴 및 반인권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시험으로 치면 100점 만점에 60점 넘기기 어려운 사람들을 골라내어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정치가 최소한 낙제라도 면하려면 이런 사람들은 퇴출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가 잘못했는데 그 사람만 운 나쁘게 걸렸으니, 용서해 주려는 이상한 측은지심을 절대로 발동해서는 안 된다. 동정심에 기반한 싸구려 사면(赦免)이야말로 부패정치의 망령을 끊임없이 부활시키는 어둠의 주술임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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