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칼럼]으로부터 시작된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을 놓고 논란이 한창인 와중에 천주교 신자이자 전직 언론인 출신인 홍의 언론지키기 천주교 모임 대표가 김 추기경의 인간적 면모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홍 대표는 김 추기경과 오랫동안 교분을 쌓아온 사이로 김 추기경이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많은 분이라고 강조하면서도 그에 대한 비판 역시 열려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강조하고 있다. 글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1971년 성탄때였다. 백일 지난지 얼마 안된 딸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명동성당 ‘자시미사’에 갔다. 성탄전야인 12월 24일 밤 12시에 시작된 이날 자시미사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해마다 명동성당의 자시미사는 KBS에서 생중계를 해왔다.

이날 미사의 강론(설교)에서 김 추기경은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강론도중 주변이 어수선해지면서 KBS-TV 중계팀이 강론도중에 철수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암담한 시국을 비판하며 박정권의 반민주·반인권을 겨냥하여 ‘쓴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문·방송사의 가톨릭신자 모임인 ‘가톨릭 저널리스트클럽’(현 한국가톨릭언론인회) 멤버로 활동해온 필자는 일찍부터 김 추기경을 가까이서 보는 기회가 잦았던 편이다.

1년에 두세 번 갖는 이 모임의 행사에는 김 추기경이 자주 참석했다. 김 추기경은 유머가 풍부하여 언제나 좌중을 즐겁게 해주었다. 딱딱한‘교회적’인 내용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였으며, 자신에 대한 일화도 자주 들려주곤했다.

언젠가 김 추기경은 자신이 사제가 되지 않을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형제 중 둘째였던 김 추기경은 두 아들 모두‘신부님’이 되게 하려는 모친의 강권으로 형의 뒤를 따라 소신학교(중학과정)에 입학하였으나 정말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학교에 독일인 교사 한 분이 무척 엄하여 학생들이 모두 무서워했다. 그분은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의 개인 책상을 철저히 검색하여 돈이 발견되면 무조건 퇴교시켰다. 김 추기경은 소신학교에서 쫓겨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하루는 일부러 책상안에 약간의 돈을 넣어두고 기숙사로 갔다.

그 날밤 김수환 학생은 “내일이면 나는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매일매일 어김없이 하던 책상검사를 그날따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래서 김 추기경의 ‘사제의 길 탈출’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두번째는 일본 상지대 신학부 재학중 4학년때 학병에 끌려갔다가 해방후 고국에 돌아와서였다. 김 추기경은 사제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대신학교(성신학원)에 들어가기 전 부산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리고 말았다.

김 추기경은 신학교를 포기하고 결혼할 결심을 하였고, 그 여인도 뜻을 함께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인과 돌연 연락이 끊겼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김 추기경은 1947년 대신학교에 들어가 1951년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됐다.

성바오로 딸 수녀회에서 제작한 김 추기경에 관한 비디오 테이프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언젠가 김 추기경이 지방강연을 가느라고 기차를 타고가는 동안 주최측에서 내준 강연 제목에 대해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강연주제갖삶이란 무엇인갗였다고 한다(‘인간의 삶에 대하여’였는지 헷갈린다). 그러던중 통로를 지나던 홍익회 직원이 판매대를 끌고 가면서 “오징어, 땅콩, 삶은 계란∼”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순간 김 추기경은 “그래, 삶은 계란...”하고 혼자 그 말을 되내이며, 삶이란 의미를 평범하게 풀어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고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김 추기경을 대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친근감’이다. 소탈하고 상대편을 편하게 해준다. 추기경으로서의‘권위’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톨릭은 미사전례 등이 매우 엄숙하다. 그 자체는 상당히 권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神)과 교회의 권위이지 인간(신부)의 권위는 아니다. 김 추기경은 현재 교회의 모든 공식직책에서 은퇴한 신분이다. 추기경으로서보다는‘인간 김수환’으로 홀가분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다.

지난달 29일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등 신임 수뇌부들이 김 추기경에게 인사를 간 자리에서 추기경이 이들에게 건넨 이야기가 며칠째 계속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사회의‘반미 친북’경향에 대하여 김 추기경이 걱정스러워 했다는 등의 대화내용이 그 다음날 아침 보수언론(조·중·동)에 큰 비중으로 보도되고, 김 추기경의 발언과 이를 자기들 입맛에 맞춰 대서특필한 조·중·동을 비판한 <오마이뉴스>의 '손석춘칼럼'이 연이어 나왔다.

그러자 이번엔 보수언론의 화살이 손석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과 오마이뉴스에 쏟아졌다.‘오마이뉴스, 김수환 추기경 비판’(조선 2.2),‘추기경까지 흔들자는 것인갗(중앙 2.3사설), ‘생각 다르다고 김 추기경 매도’(동아 2.3) 등 그야말로 맹폭이었다. 조선일보의 경우 2월 3일자 신문에 2면 ‘조선만평’, 26면 ‘조선데스크’에다 5면 ‘추기경의 고언도 왜곡하다니...’(정계반응)등 3개 면에 걸쳐 공격의 고삐를 당겼다.

우리사회에서 토론문화는 권장되어야 한다. 획일적인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어울려 있는 것이 건강한 사회이다. 따라서 추기경의 말이라도 이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대의견의 제시보다 추기경의 발언을 자기들 입맛에 맞춰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악용하는 것이 김 추기경을 더욱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열린우리당 대표들이 방문한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관계자도 그날의 대화가 ‘덕담’수준이었다고 전했다.

1969년, 47세의 나이에 추기경에 올라 70년대 초부터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김수환 추기경은 한동안 교회의 지도자보다는 우리사회의 지도자역할을 해왔다.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에서 그것은 참으로 신선한 모습이었다.

진보의식으로 사회개혁에 동참해 온 사제가 적지 않았던데는 김 추기경의 영향도 컸다고 본다. 팔순을 훌쩍 넘기고 사물을 관조하는 경지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오랫동안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보아 오면서 느끼는 건, ‘삶은 계란’의 유머가 김수환 추기경의 진면목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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