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 호 (신미술관 학예실장)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기대감으로 마음이 설레지만, 한편으로는 우왕좌왕하는 정치와 곤두박질하는 경제, 해체 위기에 놓은 공교육 등 직면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예술분야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은 위기감으로까지 이어진다.
미술관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미술관이 최고 수준의 전시를 준비하였다고 해도 관객이 찾지 않는다면 그 전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당장 먹고 사는 현실적인 문제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가로이 그림이나 감상하기 위해 미술관에 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빵을 구하는 이들에게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인 예술에 관하여 어떻게 설명 할 것인지에 대해. 옷을 벗어 던지고, 마구 물감을 뿌려 대고, 캔버스를 뒤집는 작가들의 도발적인 시도들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우리사회는 경제발전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여기고 달려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의 사회는 문화가 권력이고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제 어쩌면 좋은가. 경제만을 생각했지 문화가 경제력이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사회발전의 전략을 우리를 위한 발전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발전과 문화발전을 동시에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 필요하다.

흔히 미술을 말할 때 자유롭고, 중립적이고, 현실을 뛰어넘는 순수의 세계라고 지극히 낭만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화가를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작가 대부분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는 사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선 철저하게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가 그 나라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21세기에 부가가치가 높은 예술분야에 관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청주가 경제와 문화의 균형 있는 발전이 앞으로 경쟁력있는 국제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한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서울, 광주, 부산 등 다른 도시에서 열리는 국제미술행사를 보면 분명 국제전임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돌다 보면 외국인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각 행사들이 뚜렷한 주제의식이 결여되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와의 차별성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의 경우 대부분이 선진국 비엔날레의 재탕을 연상케 할 뿐이다. 더구나 이런 행사가 열리는 그 지역의 주민과 작가들의 정서마저도 고려하지 않는 기본이 없는 전시들이 행사를 위한 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다행히도 청주공예비엔날레 주최측은 행사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문제는 이렇게 화려한 행사 이면에 작가로서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청주를 떠나는 젊은 작가들이 있다는데 있다. 사회적 기반이 열악한 젊은 작가들에게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작업실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 기본적인 생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상태에서 어떻게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겠는가.

문화의 하드웨어격인 국제비엔날레와 같은 행사가 만들어 졌다면 이제 청주는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작가의 양성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수십억의 예산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의 행사도 중요하지만,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일은 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하드웨어는 비교적 쉽게 구축할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질 소프트웨어는 더욱 섬세함을 요하며 바로 이 섬세함이 문화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되기 때문이다. 21세기, 작가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실력 있는 작가를 키우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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