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노래> ④

▲ 이정식-청주대 신문방송학과 객원교수-전 CBS 사장
부덕(婦德)의 표상
“우리의 결혼 생활은 순탄했습니다. 그다지 큰 풍파를 겪지 아니하고 순조롭게 살아왔습니다. (중략)
그러나 꼭 한 번 남편이 30대 말기에 여성문제로 나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남편이 감정적으로 한동안 설레지만 종국에는 가정으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 의지해서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 후 모든 물결이 잠들고 남편이 환한 얼굴로 돌아왔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가정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가정안에 바쳐 온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마지막 시련을 <참음>으로써 이겨낸 것이라 믿습니다. 남편은 나의 머리요, 몸의 구주시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새기며, 그가 가정에서 멀어졌다더라도 남편에 대한 나의 신뢰로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달갑게 받아 참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밤에 쓴 인생론> (74-75쪽, 삼중당, 1984년 판)

▲ ‘구름에 달 가듯이’에 실려있는 <이별의 노래>
신앙의 힘으로 시련을 잘 극복해 낸 유익순 여사의 글은 비록 짧은 소회(所懷)이지만 읽는 이들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야말로 부덕(婦德)의 표상이다. 유익순 여사에 대해 문인들은 ‘그분은 그만한 도량이 있는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장남 박동규 전 서울대 교수도 언젠가 그의 글에서 자신의 삶의 멘토는 어머니였다고 했다. 유익순 여사는 1997년 77세로 별세했다.

박목월이 털어놓은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
<이별의 노래>가 여대생 H양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란 소문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목월도 그러한 소문에 대해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 (1973년, 1979년 삼중당)에 <이별의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써 놓았는데 다소 추상적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통해 보건대, 이것이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면 노래의 주인공이 H양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이며, 전쟁 중에 우연히 재회해 그 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병실에서 하룻밤을 간호하며 지낸 적도 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고 요약할 수 있다.

▲ ‘구름에 달 가듯이’ 책 표지
<구름에 달 가듯이>의 몇 대목을 인용하면
“세상에서 널리 불려진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오래 전 일이다. 다만 내가 젊은 청년 시대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어느 날 오월 오후다. 나의 사무실로 한 여인이 찾아왔다. 내 생애에 결정적인 운명의 발길이 이처럼 우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연한 하늘빛 갑사치마 저고리를 입은 그녀와의 대면(對面)을 나는 극히 사무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재회(再會)는 더욱 극적이었다. 화약 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모퉁이에서 나는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갸름한 얼굴에 흰 이빨이 곱게 웃고 있었다.

“살아 계셨군요. 무척 염려했어요.”
그녀의 인사였다.

전세(戰勢)는 우리에게 반드시 유리할 것만 같지 않았다. 조그만 사건이 생겼다. 그녀가 중하게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거처를 알 길이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햇빛이 범람하는 아스팔트의 저편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얗게 소복한 여인은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그녀였다. 세 번째의 우연한 해후(邂逅). 운명은 끝내 우리에게 그 신비스러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박 선생님 하룻밤만 제 병실을 지켜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병실에는 개나리가 꽂혀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불꽃처럼 명랑하고 생기가 타올랐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밤을 밝혔다. 고르고 편안한 그녀의 숨결을 조용히 지키며 밤을 새운 것이다. 새벽은 찬란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새벽에 일어나 통곡할 줄은 깨닫지 못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거나 연인이라거나 그런 의식이 없었다. 그 설레이는 암담한 시대에 내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지주(支柱)요, 그녀의 곁에만 있으면 나의 마음은 바다 같은 편안과 충족감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 밖에 내어놓고 사랑한다거나 사모한다는 말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의 전부였지만 인간 관계로서는 벗이었다.

가을이 되었다. 우리 앞에 갑자기 이별이 절벽처럼 앞을 가로 막았다. 그녀는 멀리 떠나야했다.
나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결코 동요하거나 울지 않았다. 엄청난 운명에 직면하면 사람은 누구나 침착해지는 것이다.(눈물은 나머지 날을 채울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나는 그녀의 집 앞에 이르렀다.

이튿날 오후 5시 30분. 갑자기 내 시계가 그 시각에 멎어 버렸다.

▲ 목월과 부인 유익순 여사 (어느 시장에서)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주: 현재의 가사와는 세 군데에 차이가 있다. 현재의 가사는 1절의 ‘서늘’이 ‘싸늘’로, 2절의 ‘기울며는’이 ‘끝나면’으로, 3절의 ‘우리라’가 ‘울리라’로 바뀌어져 있다.)

이것이 내가 지은 <이별의 노래>다. 물론 산촌에 눈이 쌓인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리라는 따위는 안이하고 달콤한 것이다. 나의 목마른 인생 역정의 이 쓰라린 경험은 나의 인생관을 변하게 하고, <나>라는 사람을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홀로 울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리게 되었으며, 사실 나의 슬픔은 이별이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후략)
<구름에 달 가듯이> (1979년 판에서 발췌)

진실은 무엇일까?
박목월은 글의 말미에, “이 이야기가 어느 시인이 그려 올린 가상적인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사실이라 믿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진실은 그렇게 중요하거나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그 여인이 ‘제주에서 헤어진 H양이라고 전해진다’는 평전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하는 작은 궁금증에 대한 답이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향숙씨가 취재하여, 그의 저서 <가곡의 고향>(한국문원, 1998)에 실어 놓은 것이 사실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박 시인의 생애와 수필, 훗날 작곡을 한 김성태 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주인공인 ‘그녀’는 대구 여성으로 박 시인이 대구금융조합에서 근무할 때 사무실에서 첫 대면했으며 6.25 동란시 대구 피난지에서 재회해 3년간 연애를 한 것 같다. 시 <이별의 노래>를 쓰고 그녀가 임종한 시기는 1952년 11월 초순께이다.” (이 책 62쪽)

그런데 이 노래를 작곡한 김성태(1910 - )씨의 증언을 보면,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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