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의 편집인

정치판을 뻘밭에 비유하며 불법대선 자금의 늪에 빠진 이회창씨의 곤궁한 처지를 은유적 수사법으로 묘사한 대통령의 발언이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진흙탕 뻘밭이 깨끗한 정치인으로 여겨졌던 이씨는 물론 자신마저 오염시켰다는 게 대통령의 토로였다. 그러나 정치판을 시궁창도 아니고 뻘밭에 비유한 대통령의 현실인식은 순진하게도 부적절했다는 생각이다. 우리 정치판은 뻘밭보다 훨씬 더럽고 냄새도 보통 고약하지 않은 게 시궁창을 더 닮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더러운 시궁창은 누가 치워야 하나. 시궁창을 더럽힌 자들? 천치가 아니라면 상정조차 할 수 없는 가정이다. 온몸에 똥물을 뒤집어쓰지 않고는 청소할 수 없는 게 시궁창인데, 그렇다면 결국 기댈 건 청소부밖에 없다! 그리고 우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시궁창 청소를 위해 오물에 튄 청소부를 누구도 더럽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궁창 청소를 하면서 제 몸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신이거나 아예 청소부가 아닐 것이다.

물론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치인들을 ‘청소부’와 동류항에 놓고 보려는 게 아니다. 스스로 고백했듯 대통령 역시 시궁창에 빠졌고, 똥물을 튀긴 것으로 치면 여야 모두 똑같다는 걸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양(量)의 문제로 질의 문제를 덮으려는 ‘10분의 1’ 발언이 놀랍고, 정치권의 퀘퀘 묵은 비리에 새삼 놀란 듯 호들갑떠는 ‘먹물’들이 역겹도록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가볍고 진실되지 않은 말들의 성찬을 늘어놓기보다 국리민복을 위해 고민하며 희망을 제시하는 실천적 리더십을 보여 왔더라면 국민들은 대통령에게 튀겨진 시궁창 오물을 지금처럼 심각한 시빗거리로 삼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걸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그런 리더십을 보아오지 못했다.

이렇듯 정치인에 대한 역할 기대감의 실종이 국민을 좌절케 하고 있지만, 진짜 절망의 연원은 나락으로만 굴러 떨어지는 잠재성장률 속에서 ‘사오정’ ‘오륙도’ ‘이태백’ 등 블랙 키워드들이 어지럽게 횡행한 지난 1년 내내 서민들이 겪어야만 했던 일상의 고단함에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우선순위 감각을 상실한 채 국가대사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며 4·15 총선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이다. 늘 그렇듯 뾰족한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새해가 되면 애써 희망을 일깨우려는 범부들과는 달리 그들의 신년 달력은 ‘4·15’에만 맞춰져 있는 인상이다. 그러니 패권 싸움질에만 골몰하는 그들에게서 희망대신 배신감만 확인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정치혐오나 무관심에 빠져선 안 된다. 정치인에게 국민 노릇 제대로 하며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의 길은 우리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그 기회는 4·15 총선이 될 것이고, 그 길은 방관자의 관중이 아니라 눈 부릅뜬, 추상같이 엄정한 ‘심판’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원숭이 해인 올 상반기 내내 정치판을 달굴 총선 정국은 어느 때보다 온갖 재주, 감언이설, 상징과 기호의 조작이 난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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