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한설(北風寒雪)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세모(歲暮)입니다. 이제 나흘 뒤면 2004년 새해를 맞습니다.
지난 한해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정치고 경제고 사회고 가릴 것 없이 모든 분야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만큼 갈등과 대립으로 일관해 왔기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어려운 삶을 이어와야 했습니다.

국민을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할 정치는 편안은 커녕 허구한 날 분열주의와 정쟁으로 이전투구를 일삼으며 국민을 냉소와 절망의 늪으로 빠뜨렸고 되살아 날줄 모르는 경제는 가진 것 없이 근근득생(僅僅得生)하는 힘없는 국민들을 더욱 더 지치게 했습니다.

봇물 터지듯 분출한 집단이기주의는 그때마다 폭력으로 변질돼 내내 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고 힘의 논리를 앞세운 오만한 집단들의 독선은 나라를 온통 대결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회통합을 위해 몸을 던져 나선 원로도 없었고 국론의 분열을 가슴아파한 어른도 없이 수구세력은 수구세력대로,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제 주장만을 옳다고 고집했으니 사회가 조용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지불했던 한 해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날씨가 추우면 고생하는 건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이들이야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라고들 즐겨 말 하지만 추운 잠자리에 배고픔으로 겨울을 나는 이들은 이때가 바로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영하의 차가운 지하철 시멘트 바닥에 라면박스를 깔고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에게 어찌 이 겨울이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쓸쓸한 양로원이나 고아원의 겨울도 춥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식 없이 홀로 사는 무의탁 독거노인들, 부모를 잃고 외롭게 살아가는 소년소녀가장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빈민촌의 극빈자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어깨를 늘어뜨리고 찬거리를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단속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조선족 동포들, 외국인 근로자들, 그들에게 이 겨울은 지옥의 계절입니다.

배고픔의 고통, 차가운 잠자리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 줄 배부른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40대 이상의 나이 든 장·노년 치고 지난 시절 배 곯아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국민소득 1만달러, 경제규모, 세계12위의 나라 라지만 아직도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불쌍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따뜻한 밥과 춥지 않은 잠자리이지만 그것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에는 연말이면 관청이 앞장서서 이웃돕기성금을 모으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관의 눈치를 봐야하던 기업이나 유지들이 성금도 내고 불우시설도 찾았으나 모금사업이 민간단체로 넘어간 뒤로는 명맥만 유지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경기불황 탓으로 모금 액이 예년에도 훨씬 못 미친다하고 불우시설 방문자들도 별로 없는 형편이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부상조를 덕으로 삼던 지난날의 미풍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제 해가 집니다. 온종일 허공을 날던 새들 둥지를 찾아 숲으로 돌아가고 삶에 지친 군상들, 긴 그림자를 이끌고 또한 집으로 향해 갑니다. 분류(奔流)처럼 달려온 한 해, 이제 슬펐던 일 괴로웠던 일, 훠이훠이 창공으로 날려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실낱같은 희망으로나마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밤이 가면 아침은 오고 태양은 변함없이 동녘하늘에 다시 떠오를 테니까요.

한해동안 졸문을 읽어주신 강호(江湖)의 제현(諸賢)께 감사드립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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