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 속 故 노무현 추모제, 철당간으로 자리 옮겨 진행
보수단체 선점 상당공원, 안보사진·영상물 상영 일색

봄비 치고는 제법 끈질기게 내리던 5월 22일 저녁. 청주시 상당구 성안길 철당간 광장은 온통 故 노무현 전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란색 물결로 가득 메워졌다.

행사가 주로 치러지는 중앙무대는 물론 부대행사가 진행되는 주변의 천막도 최대한 노란색으로 통일하려는 시민추모위원회의 노력이 눈에 들어왔다.

▲ 22일 열린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제. 당초 상당공원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보수단체와의 충돌을 우려해 철당간 광장으로 변경해 진행했다.
더욱이 상당수 참가자들이 노란색 비옷을 준비, 봄비가 오히려 ‘노짱’ 추모 분위기를 돋구기도 했다.

철당간, 봄비는 손님 1000명 참가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하자 1000여명의 참가자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에 손에 촛불을 들었고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분향소에 흰 국화를 올리려는 분향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날 만큼은 6.2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도 잠시 선거운동을 멈추는 분위기였다.
어깨띠나 후보 이름이 적힌 점퍼 대신 검은 양복 차림의 후보들은 명함 돌리기나 지지호소 대신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사에 참여했다.

▲ 노무현 전대통령 추모제가 열린 같은 시각 상당공원. 보수단체가 선점한 행사는 참가자 없이 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충북도의회 청주시제3선거구에 출마한 장선배 후보(민주당)는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인 만큼 선거운동 보다 고인을 기리겠다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찾았다. 이 자리를 선거운동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도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의 봄비는 추모제 훼방꾼이라기 보다 귀한 손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진전시장에는 ‘노짱’의 옛 모습을 보기 위해 우산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추모게시판이 등장하자 자신이 쓴 기록을 찾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 게시판은 1년 전 청주 상당공원에 마련됐던 노 전대통령 분향소 한켠에 걸렸던 것으로 분향을 마친 시민들이 추모의 글을 기록한 것이다.

빗 속에도 가족단위로 참가한 시민들은 판화찍기 체험장을 찾아 가족애를 과시 했으며 ‘바보노무현’이라는 운으로 오행시를 짓느라 머리를 짜내기도 했다.
추모공연과 촛불점화, 추모영상·시 순으로 진행된 공식 추모제에도 시민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시민들이 노 전대통령을 추모하기에 철당간 광장은 너무 좁고 답답했다.
한 참가 시민은 “좀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되고 공개된 장소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했으면 좋겠다. 철당간 광장은 지나치게 좁고 사방이 막혀 있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상당공원, 텅 빈 보수단체 행사장

같은 시각 청주 상당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행사용 플라스틱 의자 100여개를 깔아놓고 그 앞에 이동스크린을 설치해 안보 관련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관람하는 사람은 주최측 관계자로 보이는 한사람 뿐.
비가 내린 탓이라고 둘러댈지는 모르지만 누가봐도 행사에 성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상당공원은 노무현 추모위원회 보다 하루 앞서 사용신청서를 낸 보수단체 충북미래연합이 22일 오후 4시부터 25일 저녁 6시까지 안보문화행사를 하겠다며 선점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의 프로그램을 보면 노무현 추모행사를 막아보겠다는 의도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게 대다수 시민들의 반응이다.

실제 이들은 문화행사를 겸한 개회식과 폐회식을 제외한 4일 대부분의 일정을 안보사진전시회와 동영상물 상영으로 채웠다.
한 시민은 “상당공원에서 행사를 하는 줄도 몰랐다. 안보 문화 행사라면 최소한 관련 전문가 초청 강연이나 다양한 문화공연, 특히 최근 발생한 천안함 침몰 관련 프로그램 등이 마련됐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상당공원을 선점하겠다는 의도라는 인상이 강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도 상당공원 안보문화행사 배경을 노무현 1주기 추모제 방해로 확신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노 전대통령 서거 1주기에 맞춰 안보문화 행사를 개최한 시점도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다. 더욱이 천안함 침몰 등이 자극제가 됐다면 행사 내용을 보다 충실히 준비하고 시민참여 공간도 늘려야 했을 것”이라고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청주의 ‘민주광장’은 상당공원?
노 전대통령 서거 이후 공원 사용 실랑이 되풀이

지난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시민단체와 청주시간 치열한 신경전의 대상중 하나가 상당공원의 사용 여부다.

지난해 노 전대통령 추모 표지석 설치를 두고 강행과 불허로 팽팽히 맞섰으며 올해에도 1주기 추모제 장소로 마찰을 빚었다.
시민단체가 표지석 설치나 추모제 장소로 상당공원을 선호하는 것은 청주의 대표적인 공원이며 시민들의 참여와 행사 홍보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주지역 시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상당공원 사용을 두고 시민단체와 청주시, 보수단체간 갈등이 반복되고 있는 요인이다.

과거 민주화 운동이 활발이 전개된 지역은 이를 상징하는 광장을 갖고 있다. 서울광장이나 광주 민주광장이 대표적이며 대학내에도 민주광장이라 이름이 붙여진 곳은 집회장소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80~9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도내 충북대와 청주대 등에도 민주광장이 이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른바 청주에도 ‘민주광장’ 또는 ‘시민광장’으로 상징화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며 반대로 시나 보수단체는 내심 절대불가를 고수하고 있다.

‘민주광장’을 갖고 있는 지역은 그만큼 민주화 운동의 요람이라는 상징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서울광장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공간으로 부각되다 촛불집회와 노무현 전대통령 분향소 설치를 계기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됐다.
중국의 경우 천안문 사태 이후 천안문광장을 ‘민주광장’으로 부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후 중국 내 민주화운동 세력이 침체에 빠지면서 흐지부지 됐다.

노 전대통령 표지석 설치와 1주기 추모제로 부상한 청주 상당공원 사용 문제에 대해 시민단체 관계자는 “규모가 큰 행사는 미리 예측이 가능한 만큼 청주시나 자치단체들이 적절히 조절해 갈등을 사전에 막는 보다 적극적인 행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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