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오 경제·사회부장

한 사람이 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고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한 사람을 만났다. 그로부터 그는 조금씩 새로운 삶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식사를 해도 음식마다 의미를 부여했고 노래를 해도 가사를 음미하게 됐다. 길가에 꽃을 봐도 뭔가 다르게 보였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자신감도 생겼다.

그는 세상이 모두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겠구나’ 싶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됐다.

이들의 만남은 두 사람의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것을 즐겼다. 그렇다고 새로운 삶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다. 지금껏 경험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삶이었기에 처음에는 두렵고 겁이 났다.

이들을 시기하고 떼어 놓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손가락질 하는 사람, 뒤에서 욕하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억압하고 짓밟기 까지 했다.

이 사람들은 억압하며 선택을 강요했지만 그는 지지 않았다. 그보다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만남의 설렘과 행복이 손가락질과 억압 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르고 그도 인내하고 견디는데 익숙해 질 무렵 손가락질 하고 억압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모르고 살면 모를까 한번 알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끌리는 연인들처럼 70~80년대를 살아온 세대들에게 민주주의란 바로 이러했을 터다.

광주 5.18 묘역에서 정부가 주관한 추념 행사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지게 된 것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임을 위한 행진곡’은 체류탄 연기 자욱한 시위 현장에서 불려지던 데모가요가 아니라 80년 5월 광주에서 군화발에 짓밟히며 쓰러져간 희생자들을 기리는 국민가요가 됐다. 그런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추념식에서 퇴출됐다. 단순히 노래가 불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조금 과장해 표현하면 민주주의 퇴출이 시도된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서거한 전직 대통령의 추모 표지석을 만들어 상당공원에 세우겠다고 하니 청주시와 보수단체들이 저지하고 나섰다. 권위주의 시절 대통령은 관공서는 물론 각급 학교 교실 높은 곳에 태극기와 함께 사진을 걸어 놓고 우러르던 대상이었다는 게 무색케 지는 대목이다.

1년 뒤, 시민단체들이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시민합동분향소가 차려졌던 청주 상당공원에서 추모제를 하겠다고 하자 이번에도 청주시가 불허하고 나섰다. 명분은 이들 보다 하루 먼저 사용신청을 한 보수단체가 안보문화 행사를 한다는 것.

호국보훈의 달 6월이 행사의 적기지만 기온이 높아 부득이 전직 대통령 서거일이 포함된 5월로 앞당겼다는 보수단체의 설명이나 추모제를 젖혀 놓고 이들에게 공원을 내주겠다는 지자체 모두 눈가리고 아웅하는 소꿉놀이를 하는 듯이 보인다. 아직도 청주 중앙공원 한켠에는 5.16혁명 기념비가 버티고 서 있다. 민주주의와의 달콤한 만남이 보수정권 3년 만에 또다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에 덜 성숙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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