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에서 ‘내 탓이오’운동을 벌인 것은 1990년이었습니다. 그 보다 2년 전 평신도의 날을 계기로 신뢰회복운동의 하나로 불 당겨진 이 캠페인은 처음에는 교계 안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이내 전국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내 탓이오’는 천주교 주요 기도문에 나오는‘고백의 기도’중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슴을 세 번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는 기도문에서 따온 말입니다.

당시의 사회도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만연되고 윤리와 도덕이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고 해결방도를 찾아내자는 뜻에서 전개한 이 운동은 많은 국민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이 운동을 벌인 배경은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을 비난하는 사회분위기를 앞장서서 반성하자는 데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추기경은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된 ‘내 탓이오’ 스티커를 자동차 뒷 유리에 붙여 캠페인에 앞장섰고 모든 신도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전국의 도로에는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인 차량들이 수 없이 눈에 띄었고 그것은 곧 국민적인 회개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내 탓이오’운동은 국민적 자각을 일깨우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지만 아쉽게도 오래 가지 못하고 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만큼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혼돈과 갈등을 겪는 것은 온 사회에 만연된 너나 없는 ‘네 탓’ 풍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지역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잘못은 오로지 ‘너 때문이야’ 라는 ‘네 탓 타령’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잘 되면 내가 잘해 잘 되는 것이고 잘못 되는 것은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고약한 속담마저 있을 정도이니 남을 탓하는 못된 폐습은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듯 합니다.

정치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자신의 미숙한 국정운영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야당을 원망하는데 익숙해져있고 야당 대표라는 사람 또한 사사건건 대통령 헐뜯기를 아이 나무라듯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야당대표가 그러하건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범부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 세상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은 나로부터 비롯됩니다. 불가에서 업보(業報)를 강조함도 그 때문이요, 유가의 일체유아(一切由我) 역시 모든 일은 나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성찰의 의미일 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잊고 남 탓하기를 즐겨만 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라가 더 결딴나기 전에 ‘내 탓이오’운동을 다시 벌여야 합니다. 종교가 앞장서든 사회 원로들이 앞장서든 더 늦기 전에 범 국가차원의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됐든 국회의원이 됐든, 시어머니가 됐든 며느리가 됐든 서로 먼저 내 탓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통회(痛悔)할 때 국가이든 가정이든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 다 같이 한번 가슴을 치면서 소리 쳐봅시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고.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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