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동(충청대 행정학과 교수)

K형 !
짙은 안개와 더불어 12월이 왔습니다. ‘계절은 이제 마지막 남은 한 꺼풀의 내의마저 벗어 팽개쳤다’고 노래한 시인의 시구처럼, 한 장의 캘린더만을 남긴 채 계절은 그마저 벗어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문득 일상의 안온이 흔들림을 느끼게 됩니다. 바삐 몰아치는 생활 속에서도 시간은 무한하고 삶의 궤적은 여일할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근거 없는 생각인지를 안개낀 12월의 첫날, 출근길에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긴 이 어리석음이 어디 올해만의 일이겠습니까만은 지천명(知天命)을 목전에 둔 입장이기에 그 허허로움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흔히들 세월의 빠름을 화살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시간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만히 시간을 들여다보면 ‘터벅터벅 걸어오는 미래, 쏜살같이 날아가는 현재, 얼어붙은 듯 멈춰 있는 과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빠름에 순간 초조해 하다가, 곧 느긋해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천천히 다가오는 미래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착각도 12월에 다다르면 입장이 바뀌게 됩니다. 남아있는 미래가 한 장의 달력에 간신히 걸려있는 듯한 막막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많은 것처럼 느껴지던 시간들은 어디로 가고 노루 꼬리만큼 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마음만 분주해 집니다. 그렇기에 우리 속담에 ‘섣달이 둘이라도 시원치 않다’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K형 !
지난 11개월의 족적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기대와 설렘을 갖고 올해 첫 새벽을 맞았습니다. 특히나 월드컵의 환호와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안고 출발한 2003년이었기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새해에는 지역감정이 없어지고, 정치는 국민이 바라는 대로 개혁되고, 남북교류와 화해는 더욱 활발해지고, 경제는 탄력을 얻어 새로운 도약을 시도할 것 같은 그런 기대감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연초에 세운 금연 계획처럼 쉽게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동서간의 화합과 정치개혁은 오히려 난마처럼 꼬이고, 남북관계 개선은 부시정부의 정책 탓인지 움직임이 보이지 않고, 경제는 미.일의 경제상황과는 달리 크게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K형 !
어디 국가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대부분의 조직과 그 조직을 구성하는 우리네 서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너나없이 위태롭고 불안한 위기감에 사로잡힌 오늘의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를 창출해보겠다는 옹골찬 신년 계획은 아마도 대부분 난관에 부닥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그것은 생각보다 더 큰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생활을 관류하던 태도와 관습을 버리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 것이며, 익숙했던 제도를 바꾸는 일이 어찌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이들 변화가 때로는 불편을 강요하고, 때로는 내 이해의 일부를 내놓아야 하는 일이고 보면, 어떤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오해와 편견마저 가세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변화와 개혁은 실종되고 남는 것은 목청껏 소리치는 다툼만일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기에 12월을 맞는 마음은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채 갈팡질팡할 뿐입니다. 물론 시간이란 것이 두부모를 자르듯이 나뉘고 경계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뇌리를 치는 것은 오늘을 내일로 이전하는 것은 또 한번의 ‘자기 기만’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K형 !
비비안 리(Vivien Leigh)가 ‘스칼렛 오하라’로 열연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난비하는 포연, 생존을 위한 아수라장, 무너져 내리는 가족,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그녀의 투혼, 결국 고향 집 언덕에 올라 석양을 바라보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독백하던 그녀의 모습. 스칼라를 통해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는 것은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투혼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권한임을 확인해 봅니다.

게으름과 나약함으로 인해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내 이웃은 나와 다를 것이라는 기대에 작은 위안을 느껴보는 12월의 첫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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