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명 국립청주박물관장

청주시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암산 무심천 기름진 들판 겨레의 얼이 깃든 역사의 터전 학문과 의열은 우리의 자랑…’이라고. 어떤 얼이 깃들고, 역사의 터전은 어디인가? 얼은 사람의 머리와 마음속에 있고 말과 글에 담기지만, 삶의 터전에서 그 싹이 튼다. 맑은 고을 청주의 얼이 깃든 터의 상징은 ‘와우산’과 ‘무심천’이다. 우리는 잔잔히 흐르는 무심천 언저리를 거닐고 우뚝한 ‘와우산’을 보며 자랐다.

‘와우산’은 아득한 구석기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맑은 고을 청주의 역사와 문화의 터전이고 청주문화의 변천사를 풍부하게 밝힐 수 있는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오늘도 청주 사람들의 쉼터로 사랑받고 있는 ‘와우산’은 ‘우암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게 불리고 있으나, ‘우암산’이라는 지명은 20세기 들어와 뚜렷한 까닭 없이 바뀐 이름이다. 이제 잃어버렸던 그 이름 ‘와우산(臥牛山)’을 하루 빨리 제대로 불러야 한다. 청주문화의 집 임병무 관장은 1960년대에도 ‘와우산’ 이름을 되찾자는 시도가 있었다며 ‘와사모(와우산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자는 바람을 드러낸 적이 있다.

‘와우산’의 이름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조선 영조 때인 1757년 무렵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여지도서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충청도읍지>(1845년 무렵), <호서읍지>(1871년), <충청북도청주군읍지>(1899년) 등에도 엇비슷한 내용으로 ‘와우산’이라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자료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9년) 충청북도편에도 ‘와우산’이라 했고, 일본인 오오쿠마 쇼지(大熊春峰)가 펴낸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1923년)에도 여전히 명승고적으로서 ‘와우산’이 언급되어 있다. 이병연이 펴낸 목판본 지리지 <조선환여승람>(1933년)에서도 ‘와우산’이 확인된다. 다만, 일제가 ‘와우산’을 언제 왜 ‘우암산’이라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와우산’이 ‘우암산’으로 바뀐 시점은 1935년 무렵으로 추정될 뿐이다.

한편, 청주지역 학교의 교가에는 거의 ‘와우산’이나 ‘무심천’이 들어있다. 그 산과 내(川)가 청주의 상징이자, 지역민의 삶의 뿌리요 생명수였기 때문이다. 1904년 11월 1일 사립광남학교로 개설되고 1908년 8월 1일 청남학교(淸南學校)라 했던 청남초등학교는 이 지역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가는 ‘와우산 소나무는 꿋꿋이 크듯 나날이 의젓하게 자라는 우리…’로 시작한다. 또 1907년 청주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뒤, 1948년 교명을 바꾼 주성초등학교의 교가도 ‘고요한 와우산…’으로 시작한다. 반면에 1937년에 개교한 석교초등학교 교가는 ‘우뚝한 우암산을 바라보면서…’로 시작한다. 두 초등학교 교가의 작곡 연대는 더 확인할 일이지만, 청주지역 초창기 초등학교 교가 가사에 ‘와우산’이라 하였음은 곱씹어 볼 일이다.

이제 ‘와우산’이라 불러야할 까닭이 또 있다. 격동의 삼국시대에 무심천을 굽어보던 와우산성은 무시로 오르내리는 등산객의 발길로 몸살을 앓고, 역사의 혼이 서린 기왓장과 성돌은 발길에 채여 나뒹군다. 또 율봉역터에서 본 ‘와우산’ 북쪽 비탈도 이미 녹색치마가 벗겨지고 황토색 맨 살을 드러냈으며 곧 회색의 아파트로 뒤덮일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릴 일만 남았다. 이 모두 우리가 수 십 년 동안이나 얼빠진 채 ‘와우산’의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수만 년의 청주 역사를 간직한 문화일번지 ‘와우산’의 본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근거도 없이 바뀐 이름을 고집할 까닭이 없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가 우리의 땅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와우산’은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대대손손 청주를 감싸줄 터전이며, 그 곳에 기대어 의젓하게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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