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함께하는 역사기행 (20) -김유신장군 탄생지

단풍 따라 가을도 깊어갑니다. 골골이 타오르는 산천은 어딜 봐도 아름답습니다. 돌아오는 휴일은 머쓱하게 TV앞에 앉아있지 말고 나들이를 떠나보면 어떨까요? 빼어난 산세와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 여기에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자취를 찾아 떠나는 역사기행이 된다면 더없이 알찬 여행이 되겠지요. 그럼 축제가 열리는 진천으로 역사나들이를 떠나 볼까요.

우선 ‘김유신 장군’하면 경주를 떠올리는 분이 많을 겁니다. 그가 신라인이고, 신라장군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데다, 죽어서도 경주에 묻혔기에 경주를 생각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고장 진천을 둘러보면 김유신장군과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유신장군의 태실과 탄생지가 그렇고, 그의 영정을 모신 길상사 또한 그러합니다. 학계에선 아직도 출생에 대한 이견이 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우리고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의의가 되겠지요.  

김유신장군의 탄생지는 청주에서 진천으로 가다보면 보탑사로 가는 길가 오른쪽에, 공원처럼 꾸며져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을 만큼 공원화되었는데요, 그나마 탄생지로써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면 덩그러니 남아있는 양반가옥 일겁니다. 단출한 집 한 채에 담장도 없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옥은 인적이 드물다 보니 세인의 주목을 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너무 한적하다 싶을 만큼 외져 있지만 한땐 관청이 있던 자리로 태수가 집무도 보고 기거도 했던 곳입니다.

이곳에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지금의 진천)의 태수로 부임해 와 살면서 훗날, 신라의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유신을 낳습니다. 태령산이 품어 안은 듯한 계양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신은 무예를 닦고 화랑도를 익혀 장군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당마저 우리나라 영토에서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그래서 계양마을 사람들은 태수관저를 두고 장군터라 부른답니다.

이렇게 나라의 큰 인물들과 관련해서 전설이나 설화가 많이 전해져 오는데요, 

만노군(지금의 진천)태수인 아버지 김서현공이 형혹성(화성)과 진성(토성) 두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고 어머니인 만명부인이 금갑옷을 입은 동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신기한 꿈을 꾼 뒤 임신하여 20개월 만에 태어났다.

이처럼 김유신 장군에 얽힌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전해져 옵니다. 특히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재미있는 설화가 많이 있습니다.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해 딱딱하게 전해주기 보다 탄생설화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아이들에게도 흥미진진한 역사기행이 될 것입니다.

탄생지 옆으로 언덕을 오르면 연보정이란 우물도 만날 수 있는데요, 우물 쌓는 기법이 신라시대의 양식으로 유명합니다. 연보정은 관청에서 사용했던 우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산자락에 쌓은 우물엔 지금도 물이 고여 있습니다.

탄생지를 둘러보고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김유신 탄생지를 품에 안은 듯한 태령산에 올라보세요. 단풍의 아름다움은 물론, 무덤의 형태로 남아있는 김유신장군의 태실을 볼 수 있습니다. 태실을 둘러싼 돌들도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이제 계양마을에서 빠져나와 진천읍내로 십분 정도 가다보면 큰 길 옆으로 길상사가 보입니다. 곳곳에 유적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초행길인 사람들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솔길로 시작되는 길상사는 입구부터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은행나무 단풍과 계수나무의 달콤함에 이끌려 계단을 오르다 보면 가파른 언덕에 버티고 서있는 나무의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말없이 버틴 세월의 흔적과 질긴 생명력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하나하나 계단을 밟고 그 아찔한 높이를 다 지나야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해 놓은 사당이 나옵니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 있고 단아한 사당의 돌아보며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져보세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 왜 집을 지었을까?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아이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한 사람의 생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들려준다면 아이들의 생각도 깊어지리라 봅니다. 

사당을 나와 잠시 걸음을 멈춰보세요.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진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옵니다.탁 트인 전경은 그야말로 ‘생거진천, 사후용인’-살아서 명당은 진천이요, 죽어서 명당은 용인이란 말을 실감하게 합니다. 빡빡했던 마음도 풍요로워지는 것이 호연지기가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곡식들을 보노라면 이 작은 고장이 신팔균, 이상설을 비롯한 나라의 큰 인물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넉넉함이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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