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의 곁에서 왕명을 시행하던 승정원제도가 확립된 것은 세종 15년인 1433년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는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를 필두로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가 육조(六曹)의 국사(國事)를 분담하였습니다.

승정원에 6승지를 두었던 것은 당시의 행정조직이 육조로 편성되었기 때문이지만 승지는 육조의 일만 맡았던 것이 아니라 국사를 총괄하는 의정부, 백관(百官)의 비행을 규찰(糾察)하는 사헌부, 임금의 잘못을 간(諫)하는 사간원(司諫院), 문한(文翰)을 담당한 홍문관(弘文館)과 기타 각 기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임금이 의정부, 육조, 대간, 홍문관과 기타 각 기관에 칙령을 내릴 때는 직접 그 기관의 장이나 관원을 불러 하명하지 않고 반드시 승정원 승지를 시켜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반대로 각 기관에서 임금에게 건의할 일이 있을 때도 임금을 직접 만나 건의하는 것이 아니라 필히 승지를 통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정승, 판서를 비롯한 중신들은 직접 임금과 면대해 국사를 논의할 수는 있었지만 그 경우에도 단독으로 만날 수는 없었고 승지와 사관을 대동해야했습니다. 단독으로 면대하면 사사로운 일을 청하거나 다른 사람을 모함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지의 힘이 막강했던 것은 그처럼 임금의 곁에서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함은 물론 정치 외교 군사 등 국가기밀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승지는 책임과 도덕성 또한 무거웠습니다. 조선시대 윤리규범을 보면 “승지나 도승지는 드나 나나 말이 없는 법”이라고 평소 언행의 신중을 강조했던 것이 보입니다.

지금 청와대에는 비서실장과 제1부속실장, 제2 부속실장이 있습니다. 장관급인 비서실장은 비서실업무를 총괄하며 대통령을 보좌하고 제1부속실장은 대통령의 일과 후 보좌를, 제2부속실장은 영부인을 보좌합니다.
대통령의 하루 중 낮의 일과는 비서실장이 총괄하지만 공식일과가 끝난 퇴근 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의 사적(私的)시간은 제1부속실장이 그 임무를 맡게됩니다. 부속실장은 직급으로는 2급에 불과하지만 비서실장의 통제를 받지 않고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실세중의 핵심요직으로 꼽히고있습니다. 직책이 그렇다 보니 부속실장은 대통령의 개인적인 신임이 두터운 심복중의 심복이 임명되는 것이 관례입니다.

청와대 안에서 별칭 ‘문고리실장’으로 불리는 제1부속실장은 그때그때 대통령의 심기를 가장 잘 아는 위치란 점에서 정치권 로비스트들의 집중 타킷이 되고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시절 장학노 제1부속실장이 유혹에 빠져 뇌물사건에 연루됐던 것이 그 한 예입니다.

지난 한 주는 청와대 부속실장의 향응파문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문제의 당사자가 문책 사직을 했지만 그러잖아도 무더위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계속되는 뉴스속보에 궁금증 반, 짜증 반으로 불쾌지수를 견뎌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근신했어야 할 대통령 부속실장이 비상 근무도 아랑곳없이 3백 리 길을 잠행해 호화 나이트클럽에서 술판을 벌이고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되는 철없는 해프닝을 보면서 오늘 이 나라의 국정혼란이 우연에서 온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핵심 측근의 처신이 그러하거늘 대통령의 인기가 좋아진다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일이 아니었던 듯 합니다.

요즘 청주 발 핫뉴스가 너무 자주 전국에 떠 낯이 뜨겁습니다. 남녀 도의원들이 대낮에 술 취해 육박전을 벌이질 않나, 부속실장 ‘술판 몰카’로 전국의 시선을 모으질 않나, 청주가 3류 저질드라마의 진원지가 되고 있기에 말입니다. ‘교육문화의 도시’가 무색합니다.

그건 그렇고, 만인의 부러움을 사던 재벌회장이 투신 해 목숨을 끊었습니다. 속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일 입니다. 그러고 보면 권력이 좋은 것도, 재벌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 듯 싶습니다. 범부(凡夫)의 자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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