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_서원대학교 교수, 정치학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통해 연이어 폭로되는 삼성의 비리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특히 지난 26일의 폭로 내용은 가히 메가톤급이라 할 만하다.

수조 원대의 분식회계와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 조성, 중앙일보 위장 계열분리, 삼성차 법정관리 관련서류 불법폐기 등등. 그 규모와 대담성에 쉽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삼성이 만들면 다르다’고 했는데 비리도 그런 모양이다. 물론 삼성측은 폭로 내용이 허위이거나 과장 또는 왜곡되었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김변호사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또 관련 물증도 함께 제시되고 있어 폭로 내용 중 적어도 상당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 이 같은 엄청난 비리 내용을 접하고 충격을 받으면서도 삼성을 극단적으로 비난하고픈 느낌은 솔직히 그리 강하지 않다. (비리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삼성이 어설픈 해명을 시도하고 김변호사를 인신공격하는 데서 느껴지는 분노와 실망감이 훨씬 더 크다.)

아마 이 같은 의외의 관대함은 삼성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거의 모든 재벌 기업들이 정도에 있어서 차이는 있겠지만 삼성과 유사한 비리를 관행적으로 저질러 왔고 지금도 그런 비리를 진행 중에 있을 것이라는 짐작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삼성 경영진에 대해 엄중한 사법적 단죄가 내려져야 하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중대한 교훈을 얻어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던 IMF 외환위기 시절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던 ‘대마불사’의 신화가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대우 등의 재벌 기업이 하나둘씩 처참히 무너지면서 ‘대마도 죽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신화로 바뀌게 되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잘못도 없는 일반 서민들이 이로 인해 얼마나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그러나 이 위기를 우리 국민들이 나름대로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업구조를 만들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자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위기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또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삼성 비리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새로운 위기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속출하는 외환위기식의 어려움이 초래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번 사건을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갈 경우 우리 사회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 기업, 우리 경제,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동안 위기 극복과 성장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달러를 벌어 세계적 경제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업 비리는 눈감아줄 수 있고, 경제를 위해서는 도덕과 정의도 일시 유보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바로 그러한 위기의 중요한 단면이고 그 구체적 증세가 바로 삼성 비리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선을 돌려보면 이 같은 증상이 삼성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도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다. 인간과 환경 같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요소에 대한 강조보다는 역사를 70년대로 돌려놓은 듯한 요란한 경제성장 구호가 유권자들에게 훨씬 효과적으로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굳이 더 많은 사례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이런 쪽이라는 데 대해 이견을 말하기 어렵다. 더 늦기 전에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으로의 진로 수정을 서둘러야 한다. 삼성 비리 사건은 그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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