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의 화두는 단연 ‘도지사관사의 폐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가 개방되는 마당에 일제의 유산이요, 권위주의의 상징인 지사관사를 폐지해야한다는 주장이 도지사와 시민단체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되고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기관 단체장들의 관사를 폐지해야한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된바있습니다. 충청리뷰는 지난 99년 봄 도지사를 비롯해 검사장, 법원장, 시장, 군수 등의 관사를 폐지하라고 기획 보도한 바가 있습니다. 기사의 골자는 ‘민주사회에서 기관장 한 사람을 위해 몇백 평, 아니 몇천 평의 공간을 쓰는 게 과연 타당한갗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검사장, 법원장, 시장, 군수들 모두 관사를 떠나 아파트로 옮겼고 현재 그대로 있는 것은 지사관사 한군데 뿐 입니다.
사실 문제가 되고있는 지사관사는 호화롭지도 않을뿐더러 비난의 대상이 될 정도로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성동 향교 앞 언덕바지에 있는 지사관사는 모두 2880여 평으로 넓긴 하지만 비탈이 많고 건물은 지은 지 오래되고 낡아 실제 시중의 일반주택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습니다.
일제 때 지은 일본식건물인 앞의 구관(60평)은 주로 손님 접대와 회식공간으로 쓰이는데 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순시 차 내려오면 지역 유지들을 불러 점심을 들곤 했습니다. 숙소인 뒤쪽의 2층 신관(79평)은 말이 신관이지 지은 지 34년이나 됐고 공간도 불편해 전임지사 어떤 이는 좁은 계단을 오르다 다리 골절상을 입은 일조차 있습니다.
지사관사는 풍수지리학상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뒤에 산을 지고 앞에 무심천과 청주시내가 한 눈에 굽어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아 풍수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아, 명당이네”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곤 합니다. 터로 따진다면 지사관사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의 상짱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속리산에 거점을 둔 빨치산 40여명이 야음을 틈타 상당산성을 거쳐 지사관사를 습격해 보초를 서고있던 경찰관을 살해했던 적이 있는 기분 나쁜 곳이기도 합니다.
듣자하니 이원종지사는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뒤 참모회의에서 관사용도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지사는 자신의 거처는 그대로 두되 앞쪽 구관은 개방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간부들은 시민단체들의 주장에 몹시 민망해하면서 영빈관으로 쓰던가. 역대 지사 사료관(史料館))으로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시내에 변변한 호텔 하나 없다 보니 평소 손님이 올 경우 마땅히 묵을 곳이 없어 난처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접대용 숙소로 쓰는 것이 좋겠다는 공통된 의견이었고 사료관 역시 ‘굿 아이디어’라는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입장은 아주 다른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서 지사관사를 폐지하라는 본래의 뜻은 그 공간을 시민들을 위한 것으로 완전히 돌려 달라는 것이지, 지사가 그곳에 사는 것이 배가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식의 차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당사자인 지사로서는 참으로 황당할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다한들 관사까지 내 놓으라고 하니 그 심정,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이미 대통령이 별장까지 국민에게 내 놓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이러면 좋을듯합니다. 기왕에 개방하기로 작심이 섰다면 시민을 위한 시민의 공간으로 흔쾌히 돌려 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시민을 위한 것이기에 말입니다. 후임 지사들로부터 관사마저 없앴다는 원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뒤집어 생각하면 ‘용기 있는 지사’로 역사에 기록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존폐논쟁은 무의미합니다.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기 때문입니다.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걸주(桀紂·역대중국의 폭군)가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은 까닭이다. 그 백성을 잃은 것은 민심을 잃은 까닭이다. 민심을 얻는데는 방법이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들어주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뿐이다.’ 오늘 이원종지사가 음미해볼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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