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의병 창의의 현장을 찾아서

▲ 제천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수리 시설 가운데 하나인 의림지는 삼한시대에 만들어져 현재도 이용되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때의 음악가인 우륵이 만들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으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현감인 박의림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영호정을 비롯한 호수 주변 자체가 구한말 의병운동의 현장이다. 의림지 한켠에는 후기 의병의 대표적 인물인 이강년 대장을 끝까지 지키며 항거하다 순절한 소년 의병 홍사구의 묘도 있다.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지방이라고도 부르는데,여기서 말하는 호수는 바로 의림지를 가리킨다. 들판이 텅 비어가고 있다. 겨울의 구름들이 차창으로 낮게 내려앉고 있다. 제천으로 가는 길은 저절로 운전대에 힘이 잔뜩 들어가게 한다. 시멘트와 레미콘을 가득 실은 큰 차들의 통행량도 많고, 큰 산들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기다랗고 컴컴한 터널도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방게 같은 작은 차에, 운전 하는 이의 간까지도 작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이렇게 크고 작은 두려움이 다가오는 과정을 어떻게 지나가는가에 대한 물음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다보면 계절의 변화에 대해 민감해진다. 한 알의 씨앗은 돌고 도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삶의 단계를 진행시킨다. 계절의 순환에서 끝이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계절의 변화를 거쳐 지금 여기에 와있는가. 지난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이 다 저물어 가도록 쉽사리 답을 내어주지 않는 여행길이지만 끝까지 지치지 않게 하는 힘 또한 내 안에 있으렸다! ▲ 제천 의병 기념탑에서 보는 자양영당
언젠가 저 강물이 얼어붙는 날/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내가 한 일들이 곧 내 인생인지// 사람들이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네/ 어떤 이는 도움을/ 어떤 이는 상처를 주려 했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그들의 지독한 사랑이나 미움이/ 어떻게 달랐었는지// 나 그대의 말을 들으리/ 그대와 돌아서서/ 저 말없는 강물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으니// 우리는 알고 있네/ 저 강물 속에, 흐르는 물살이 숨겨져 있음을/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침묵을 안고 수 마일을 흘러왔고 흘러갈 것을/ 저 강물의 말이 곧 나의 말임을- 윌리엄 스태포드의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중에서-

박달재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친절하게도 ‘자양영당’이라고 써있는 이정표가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준다. ‘흠! 자양영당 가는 길은 이젠 찾았고. 그럼 또 한 곳, 그동안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꽃피는 학교」는 어디 있는 걸까? 자양영당이 있는 봉양읍 공전리라고 하던데? 일단 자양영당부터 가보고 나서 또 거기서 물어물어 찾아가보야겠지...... ’

어쩌면 생각보다 빠른 게 자동차 속도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의문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고갯길을 넘어서자마자, 공전리 입의 작은 표지판이 또 학교가 이곳 가까운 데에 있음을 알려준다. 갑자기 길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적어도 길을 몰라 헤매는 막막함에 빠지지는 않으리라는 안도감이 초행길의 부담을 덜어준다.

‘꽃피는 학교’는 예전의 공전초등학교에 세운 중등 과정의 대안학교이다. 나는 작년부터 이 학교를 한번쯤 꼭 들러봐야겠다고 내심 벼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내 길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 늦깎이로 아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교육 현장으로 뛰어든 게 어언 십 년이 넘어가는데, 그동안 쌓아온 외부 경력과 다르게 나의 내면이 텅 비어있는 건 아닌가. 늦가을 휑한 운동장을 굴러다니는 포플러 나뭇잎 소리처럼 그 어두운 목소리는 그렇게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 꽃피는 학교 자양영당과 한 마을에 있다시골 작은 학교 운동장에 서면 누구든 저절로 가늘게 눈이 떠지고,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 고인다. 어릴 적 우리의 본디 모습이 거기서 뛰놀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높은 소리가 들려오고, 아직은 한 자락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참된 이치를 심어야 하는 곳, 그 곳이 바로 교육 현장이다. ▲ 의림지를 내려다 보고 있는 홍사구의 묘
시골 작은 학교에 운동장에 서면 누구든 저절로 가늘게 눈이 떠지고,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 고인다. 어릴 적 우리의 본디 모습이 거기서 뛰놀고 있기 때문이다. ‘꽃 피는 학교’ 운동장에도 마른 잎 구르는 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교실 창문 너머로 아이들의 높은 소리가 들려오고, 그 사이로 간간히 젊은 남자 선생님의 것 같은 굵직한 음성도 들려온다.

나도 저렇게 아이들의 말이 살아 춤추게 하고, 나는 단지 그 말판을 바닥에 깔아 놓기만 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내 목소리가 커지고 아이들의 목소리는 작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오! 하느님, 이건 아니었습니다! 꽃은 이렇게 피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은 가을 햇살이 비치고 있는 학교 운동장에 핸드폰 메시지가 날아온다. ‘한미FTA저지 총궐기대회’가 있단다. 내가 흔들릴 때, 그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외부에서 휘몰아쳐오는 바람이다. 살다보면 겨울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못 견디고는 뿌리가 튼튼함이 중요하다. 그 뿌리의 힘을 기르는 행위가 바로 교육이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교육이 더 중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조선(朝鮮)이 다 저물어 갈 무렵, 제천 봉양 산골짝 공전마을에 자양서사(紫陽影堂의 전신)가 세워진다. 이곳에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흔들리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다. 어쩌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그들 내부에서 늦가을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왔는지도 모른다.

꽃피는 학교를 뒤로 ‘한미FTA저지’란 메시지가 담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자양영당 앞마당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구한 말 위정척사의 토론장이었고, 단발령과 을미사변(민비시해 사건)의 부당함에 대해 소리 높여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마당 한 편의 제천의병기념탑과 의병전시관이 그 모습을 말해주고 있어 좀 더 가깝게 보려고 성큼 다가서는데, 등 뒤에서 “잘못 왔구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양영당을 세웠다는 성재 유중교가 살던 집 앞에서 한 어르신이 김장거리를 다듬고 계신다. 지나가는 이에게 아는 체를 하시는 게 반가워 얼른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월요일은 문이 기념관이나 영당 모두 문이 닫혀 있으니 잘못 찾아왔다며 한 말씀 더 하신다. 휴관일도 못 맞춘 것은 답사객으로서는 낭패이긴 하다.

난감해진 눈이 빈 텃밭으로 간다. 다 뽑고 난 빈 밭에 배추 몇 포기가 남아 있다. 시장기가 밀려온다. ‘저거 몇 잎 뜯어먹으면 참 맛있겠다.’ 눈으로나마 주섬주섬 배춧잎을 챙기듯, 이왕 온 길 어르신께 바싹 다가앉으며 몇 말씀 더 여쭈었다. 70여년이 넘게 이 자양영당 옆 고택에서 살아온 이력에서 의병이야기를 주워들을 요량이었다.

우리의 큰 역사에 있어 대다수의 백성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때는 언제일까. 역사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 ‘그래야 한다’는 명분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움직일 수가 있는 걸까. 김장 밭 옆 똑 고른 땅이 있어 혹시라도 농작물 씨앗이라도 심겨 있을 것 같아, “여기는 뭐 심은 거예요?” 라고 물어보는 내게 “마늘 심었어.”라고 확실하게 답하시는 어르신. 그러면도 자양영당과 제천 의병에 관해 물어보는 말에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어르신. 그게 대다수 우리네 백성들의 모습일 텐데, 과연 우리의 삶과 역사는 과연 어떻게 맞물리는 것일까.

▲ 자양영당 1906년(고종 43) 유림에서 창건한 서당이다. 처음에는 주자(朱子)와 송시열(宋時烈), 이화서(李華西), 유중교(柳重敎)의 영정만을 봉안하고 있었는데, 뒤에 유인석(柳麟錫), 이직신(李直愼)의 영정을 추가로 봉안하여 춘추로 이들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원래 이곳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유중교가 1889년(고종 26)에 세운 창주정사(創州精舍)가 있던 자리이다. 유중교는 고종 13년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춘천에서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로 이사하여, 후에 자양서사(紫陽書祠)라고 이름을 고친 이 서당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이 자양서사는 1895년(고종 32), 의병장 유인석이 팔도의 유림들을 모아 창의(倡義)의 비밀회의를 하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또, 이 서당에는 《화동강목(華東綱目)》의 판목(板木)이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초기 의병 시절, 국모의 시해나 의관 제도를 고치는 일로 유림들이 의병 창의를 했을 때, 대다수 민심의 호응은 그다지 높지 않았었다. 그건 실제 삶과의 거리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평민 출신의 동학도를 배제하기도 했고, 더욱이 의병 내에서도 신분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미년으로부터 10년 후, 을사의병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과는 달리 유림을 비롯하여 벼슬아치, 농민지도자, 포수 등 모든 신분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는 일제가 나라를 껍데기만 남기는 데 대한 반발에서만이 아니었다. 식량을 빼내가고 대신 옥양목 등의 각종 신문물을 들여오면서 농민 경제가 완전히 식민지 경제 구조로 바뀌는 데 대한 위기 의식이 컸기 때문이었다.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초기 의병의 산실, 자양영당에서 의병 활동의 무대인 의림지로 가면서 나는 역사의 힘의 근원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바로 대다수 백성들의 삶에 나오며, 또한 우리들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일 텐데, 그러면 우리들 의식은 또 어디서 길러져야 하는 것일까. 이 곳 제천 땅에서 창의를 한 의병의 뿌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 7년 7월 11일에는 제천군 봉양면 천남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크게 이긴 정미의병이 여기에 모여 전열을 재정비하였고, 이강년이 호서창의대장으로 추대된 곳
농민이 기본 동력이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없었다면 의병활동이 제대로 발화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후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그 춥고 어려웠던 시기의 독립 운동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우리의 저항 정신을 폄하한다고 해도, 빼앗긴 우리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뿌리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저물녘 의림지 호수에서 나는 심한 허기를 느낀다. 거세게 불어오는 ‘한미FTA’ 바람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나 저기 한 자락 빛줄기가 아직 얼기 전의 저녁 호수를 반짝반짝 물들이고 있다. 춥고 어두운 시절, 허리띠를 졸라매며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모진 겨울을 이겨낸 우리들 정신이 저기 호수 건너편과 맞닿아 있다. 역사의 카메라 렌즈에선 더더욱 선명히 그 빛줄기가 다리가 되어 그려지고, 이어져 있다. 그런데 지금 그 다리를 우리의 아이들이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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